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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24부 : 기억을 먹는 새빛의 언덕에서 2025. 10. 24. 12:40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은 한동안 평온했다. 감정의 고리는 여전히 매일 다른 색으로 물들며 도시의 감정을 비추었고, 세린의 벽화들은 점점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아이들은 벽화를 따라 걸으며 자신들의 마음을 배웠고, 어른들은 그 그림 앞에서 잊고 있던 감정을 되찾았다. 리안테르는 완전해 보였다. 감정이 흐르고, 언어가 살아 있고, 기억이 예술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완벽함이 오래 지속된 적은 없었다. 모든 평화는 균열을 품고 태어나는 법이었다.
그 징조는 아주 미묘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의 꿈이 사라졌다. 누구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대신 깊은 잠 속에서 이상한 현상을 겪었다. 아침이 되면 자신이 어제 느꼈던 감정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희미해지고, 벽에 적힌 자신의 글이 낯설게 느껴졌다. 감정의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세린은 처음 그 이상을 느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녀가 그린 벽화의 빛이 약해지고 있었다. 하루 전만 해도 따뜻한 색으로 빛나던 그림들이 점점 회색으로 변해갔다. 그녀는 손끝으로 그림을 만지며 속삭였다. “왜… 당신의 미소가 흐려지는 거죠?” 그때, 바람이 지나가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가 슬퍼하며 노래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날 밤, 세린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하늘은 새카맸고, 그 어둠 속에서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새는 별빛을 한 움큼 삼켰다. 삼킬 때마다 하늘이 더 어두워졌다. 세린은 두려움에 떨며 물었다.
“너는 누구야?”
새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나는 기억을 먹는 새. 감정이 오래 머물면, 그것은 곧 고통이 된다. 나는 그 고통을 없애기 위해 태어났다.”
“그럼 너는 감정을 지우는 거야?”
— “아니, 나는 단지 균형을 맞출 뿐이다. 감정이 너무 오래 남으면, 인간은 자신을 잃는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야!”
새는 날개를 퍼덕이며 웃었다.
— “살아 있다는 건 느끼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세린은 깨어나자마자 언덕으로 달려갔다. 빛나무는 여전히 서 있었지만, 그 빛은 이전보다 약해졌다. 가지 끝마다 희미한 그늘이 스며 있었다. 루디안이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마치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담담했다.
“봤구나, 그 새를.”
“그게 뭔지 알아요?”
“오래전부터 예언되어 있던 존재야. ‘감정의 역류’라고 부르지. 감정이 너무 오래 머물면, 그것은 빛이 아니라 그림자를 만든다. 그 그림자를 먹는 존재가 바로 그 새야.”
“그럼 방법이 없나요?”
“있지.” 루디안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감정을 잊지 않으려면, 감정을 나누어야 한다. 한 사람의 마음에 오래 머무르면 썩지만, 모두의 마음에 나누어 담기면 사라지지 않지.”세린은 결심했다. 그녀는 다시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 도시의 사람들의 기억을 담았다. 아이들의 웃음, 노인의 한숨, 연인의 약속, 친구의 작별. 하루 종일 거리에서 이야기를 듣고, 밤마다 벽 위에 그 감정을 옮겼다. 그림이 늘어날수록 새는 리안테르에 접근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감정이 흩어지고 연결되면서, 한 사람의 고통이 도시 전체의 빛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새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세린이 잠들면 여전히 꿈 속으로 찾아왔다.
— “넌 헛된 일을 하고 있어. 감정은 결국 사라져야 해.”
“아니. 감정은 형태를 바꿀 뿐이야.”
— “그럼 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내가 버티지 않아도 괜찮아. 이건 나의 감정이 아니니까.”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하늘에는 새로운 현상이 생겼다. 새벽마다 검은 깃털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고, 그 깃털이 떨어진 자리에 작은 빛의 알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것을 ‘감정의 씨앗’이라 불렀다. 세린은 그 씨앗을 모아 도시의 중심에 심었다.
며칠 뒤, 씨앗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무가 아니었다. 바람처럼 투명하고, 물결처럼 흔들리는 빛의 생명체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감정의 새’라 불렀다. 그 새는 매일 밤마다 하늘을 날며 사람들의 기억을 모았다. 잊혀진 감정들을 찾아서 다시 빛으로 되돌리는 역할을 했다.
루디안은 언덕에서 그 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건 로안의 심장이 다시 피어난 거야. 감정은 바다를 떠나 하늘을 날기 시작했군.”
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우리가 감정을 지키는 게 아니라, 감정이 우리를 지키고 있어요.”그날 밤, 리안테르의 하늘은 다시 밝아졌다. 별빛이 깜빡이며 노래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으로 그 빛을 느꼈다. 그리고 새벽이 올 무렵, 세린은 벽에 마지막 문장을 남겼다.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혹은 새의 날개 아래에서,
그것은 언제나 다시 태어난다.”그 문장이 완성된 순간, 검은 새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늘에는 단 하나의 거대한 새가 남아 있었다.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를 펼치며, 도시를 덮는 하얀 감정의 새.그날 이후, 사람들은 매년 봄마다 하늘에 떠오르는 그 새를 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저건 우리의 기억이야. 잊히지 않으려는 마음의 모양.”그리고 리안테르는 또 한 번 변했다.
이제 감정은 말로 남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을 나는 빛으로, 바람 속의 잔향으로 존재했다.“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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