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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12부 : 잃어버린 목소리들의 행진
    빛의 언덕에서 2025. 10. 11.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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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새벽은 이제 더 이상 무채색이 아니었다. 며칠째 계속된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과 푸름이 섞인 미묘한 빛이 도시 위를 덮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인간이 다시 살아 있다”는 징표처럼 느껴졌다. 감정억제망이 해제된 이후, 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리듬을 갖기 시작했다. 감정감지기의 불빛은 모두 꺼졌고, 방송국에서는 더 이상 “질서 유지 지침”을 송출하지 않았다. 대신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시작은 언제나 불안의 그림자를 동반했다.

    감정검열국은 해체되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도 남은 고위 인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감정 복귀 사태”를 ‘정신적 바이러스’로 규정했다. 도시 곳곳에는 새로운 구호문이 붙기 시작했다.
    “감정은 전염된다. 통제하지 않으면 파멸이 온다.”
    이 문구를 본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읽었지만, 아무도 찢거나 지우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 문구 아래엔 작은 글씨가 덧붙여졌다.
    “그럼 기꺼이 감염되겠다.”
    익명의 낙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만에 수백 곳으로 번졌다.

    엘라 미렌은 여전히 행방이 묘연했다. 루디안만이 그녀의 생사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빛의 언덕 아래에서 마지막 신호를 남긴 뒤 의식을 잃었다. 루디안은 그녀를 데리고 언덕 아래의 폐허로 향했다. 그녀의 맥박은 약했지만, 살아 있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을 때, 처음으로 감정이 ‘따뜻한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당신은 나를 바꿨어요.” 그는 낮게 말했다. 그러나 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 안에 오르골의 잔해가 있었다. 금속은 부서졌고, 내부의 부품들은 뜨거운 빛을 머금은 채 꺼져 있었다.

    며칠 뒤, 루디안은 검열국의 잔당들에게 포위당했다. 그들은 감정 억제 체계를 복원하기 위해 ‘감정 제거 계획’을 재가동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변해 있었다. 단 한 사람, 젊은 기술관이 말했다. “그녀의 음악을 들었어요. 그건 명령이 아니라, 기억이었어요.” 그 말은 루디안을 잠시 멈추게 했다. 그리고 그는 결심했다. 다시 한 번, 도시의 중심으로 나서기로.

    도시 광장, 오래된 전송탑이 있는 곳. 루디안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탑은 한때 감정검열국의 신호 송신기였다. 이제 그는 그 송신기를 새로운 용도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사람들에게 ‘진짜 목소리’를 되돌려주는 일. 그가 탑의 제어 패널을 켜자, 낡은 화면이 깜박이며 빛을 냈다. 거기에는 여전히 하르브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 시스템의 잔존 명령어가 떠올랐다.
    [감정 억제망 재부팅 준비 중]
    루디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명령어 수정] → [억제망 전파 = 감정 해방 신호로 대체]
    그의 손끝이 마지막 키를 눌렀다.
    “Execute.”

    도시의 전광판이 동시에 깜박였다. 스피커마다 새로운 파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번엔 기계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동안 삭제되었던 기록, 검열된 회상, 억눌린 감정들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불렀어요.”
    “그 사람의 웃음소리를 아직 기억해요.”
    “나는 두려웠지만, 그 두려움조차 나였어요.”
    이 목소리들은 서로 겹치며 도시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빛의 언덕에서 희미한 울림이 들렸다. 엘라의 오르골이었다.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그 금속 상자가, 다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엘라가 남긴 마지막 에너지가 다시 깨어난 것이다. 오르골은 스스로 태엽을 감는 듯한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목소리예요. 노래는 멈추지 않습니다.”

    루디안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시의 구름이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감정감지기의 폐허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 하나가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며 잎사귀가 반짝였다. 그 위로 새들이 날았다. 도시에서 새소리를 듣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매년 그날을 ‘감정의 날’이라 불렀다. 누군가는 그날을 축제로 삼았고, 누군가는 그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감정검열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리안테르는 처음으로 진짜 민주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혁명’이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불렀다.
    “노래의 귀환.”

    밤이 되면 여전히 도시 어딘가에서 오르골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들으며 잠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시 꿈을 꾸었다. “하늘을 나는 꿈,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꿈,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꿈.”

    그 꿈의 시작과 끝에는 언제나 같은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목소리로 다시 노래한다.”

    리안테르의 시대는 그렇게 바뀌었다. 감정은 금지된 언어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의 중심에는 언제나 두 이름이 있었다. 엘라 미렌, 그리고 레오 알라리스.

    — 그들의 노래가 멈춘 날, 리안테르는 처음으로 고요했다.
    — 그러나 그 고요 속에서, 새로운 멜로디가 태어나고 있었다.
    “이건 끝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첫 번째 리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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