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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1부 : 잿빛의 끝에서 피어난 날들빛의 언덕에서 2025. 10. 10. 12:37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은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가지 색만을 품고 있었다. 잿빛. 빛이 스며드는 틈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세상, 감정이 삭제된 도시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숨은 노래”가 흘러나온 그날 이후, 도시의 공기는 이전과 달랐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온기가 거리마다 번져 있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걷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유를 모른 채 웃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다. 감정이 돌아오고 있었다.
엘라 미렌은 그날 밤 이후 행방이 묘연했다. 감정검열국은 ‘비인가 감정파 발신자’로 그녀를 추적했지만, 이미 도시 곳곳에 퍼진 음악의 파동이 시스템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검열국 본부의 모니터에는 붉은 그래프가 끊임없이 요동쳤다. 수천 개의 감정지표가 동시에 활성화되고 있었지만, 그건 감시할 수 없는 종류의 진동이었다. 사람들의 ‘감정’이 네트워크 자체를 흔들고 있었다.
루디안 크로스는 여전히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는 더 이상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귀에는 아직도 그 노래가 남아 있었다. 오르골의 멜로디가, 어머니의 자장가처럼 반복되었다. 그는 감정검열국의 데이터실을 홀로 지키며, 시스템의 깊은 곳에서 한 줄의 메시지를 찾아냈다.
“루디안, 감정은 너를 지우지 않아. 오히려 너를 기억하게 하지.”
그건 하르브의 목소리였다. 검열국의 창립자이자, 시스템의 설계자. 그리고 감정을 끝내 버리지 못한 인간. 루디안은 눈을 감았다. 손끝이 떨렸다. 그는 총 대신 오래된 금속 카드를 꺼냈다. 하르브가 남긴 비상 명령키. 그것을 시스템의 중앙 제어기에 꽂으면, 감정 억제망 전체가 정지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도시의 모든 보안장치가 해제되고, 혼란이 찾아올 것이다.“질서를 버리고, 인간을 택할 것인가.”
그는 그 문장을 속으로 반복했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그게 감정이라면… 이미 나는 감염되었군.”그 시각, 도시 외곽의 버려진 발전소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켜졌다. 엘라였다. 그녀는 부서진 기계들 사이에 숨어, 오르골을 돌리고 있었다. 레오가 남긴 신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르골 속의 마지막 데이터가 완전히 해석되면, 도시 전체로 ‘감정 파동’을 방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체력의 한계에 다다랐다. 손끝은 피로 얼룩졌고, 숨결은 점점 짧아지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속삭였다. “레오… 이제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면…”
그때, 문이 열렸다. 금속이 긁히는 소리. 그리고 낮고 조용한 발소리. 루디안이었다. 그는 총을 들고 있었지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지 않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 끝내야 합니다.”
“무엇을요? 나를? 아니면 감정을요?”
루디안의 손이 떨렸다. “둘 다 아닙니다.” 그는 천천히 오르골 앞에 다가갔다. “당신이 이걸 완성하면, 도시의 구조는 붕괴됩니다.”
“그건 붕괴가 아니라, 다시 태어남이에요.”
“당신은 희생을 너무 쉽게 말합니다.”
“희생은 쉬운 말이 아니라, 인간의 유일한 언어예요.”엘라의 눈빛은 단단했다. 루디안은 잠시 숨을 멈췄다가, 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제복 안주머니에서 금속 카드를 꺼냈다. “하르브가 남긴 최종키입니다. 감정 억제망을 끌 수 있습니다.”
엘라의 눈이 커졌다. “그럼…”
“하지만, 동시에 이 도시는 무방비 상태가 될 겁니다. 당신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혼란은 인간이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루디안은 미소도 없이 말했다. “당신은 교사고, 나는 살인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군요.”그는 금속 카드를 오르골의 전송 포트에 꽂았다. 순간, 공간이 흔들렸다. 빛이 오르골의 표면에서 번쩍이며 퍼져나갔다. 금속의 울림이 진동으로 바뀌고, 진동은 곧 음악이 되었다. 멜로디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르골의 음색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악기처럼 공명하고 있었다. 건물, 도로, 전선, 하늘의 구름까지—모든 것이 하나의 선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색이 있었다. 회색과 푸름이 섞인, 새벽의 빛. 그리고 그 빛 아래에서 사람들은 울었다. 슬픔 때문이 아니라, 오랜만에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서’였다.
루디안은 엘라의 옆에 앉았다. 그의 제복이 먼지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이 노래가 끝나면… 당신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게 나의 마지막 수업이겠죠.”
“수업?”
“아이들에게 가르쳤어요. 감정은 배워야 하는 게 아니라, 기억해야 하는 거라고.”루디안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르골의 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도시의 모든 감정억제 장치가 멈췄다. 신호등이 꺼지고, 확성기의 방송이 멈췄다. 그러나 그 대신, 리안테르 전역에서 수많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의 대화, 노인의 기도, 그리고 사람들의 이름. 도시가 살아 있었다.
엘라는 마지막 힘을 다해 오르골의 태엽을 감았다. “레오, 이제 당신의 노래가 끝났어요. 하지만 세상은 아직 계속됩니다.”
루디안은 그 옆에서 조용히 속삭였다. “빛의 언덕이… 다시 열리고 있군요.”하늘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잿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처음 보는 빛이 번져갔다. 사람들은 그 빛을 바라보며 입을 모았다.
“인생은… 아름답다.”그 말은 오래된 문장처럼 들렸지만, 그날의 리안테르에서는 처음으로 진심이었다. 그리고 엘라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손 위에서 오르골의 마지막 음이 사라질 때, 도시의 새벽이 완전히 열렸다.
— 그날 이후, 리안테르는 더 이상 ‘무표정의 도시’라 불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렇게 불렀다.
빛의 언덕, 감정이 피어난 곳.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