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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29부 : 기억의 파편들빛의 언덕에서 2025. 10. 29. 12:33반응형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리안테르는 이전과는 다른 도시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보였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느끼기 시작했지만, 감정은 더 이상 한 가지 색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웃음 속에는 슬픔이 스며 있었고, 기쁨의 끝에는 두려움이 깃들어 있었다. 감정이란 것이 하나의 언어가 아니라, 수백 개의 진동이 겹쳐진 복합체라는 사실을 모두가 깨달은 것이다.
무음의 아이는 그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도시를 거닐며 사람들을 바라보고, 손끝으로 그들의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의 고백 앞에서는 손을 가슴에 얹었고, 누군가의 눈물 앞에서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공기가 흔들렸고, 그 흔들림 속에서 희미한 기억의 조각들이 피어났다.
그것은 오래된 장면들이었다.
어떤 것은 세린의 웃음이었고,
어떤 것은 로안이 아이에게 건네던 말이었다.
또 어떤 것은 엘라의 목소리였다.
— “감정은 죽지 않아. 단지 다른 모습으로 기억될 뿐이야.”아이의 손끝에서 흩어지는 빛의 파편들이 공기 중에서 모여들며 장면을 만들어냈다. 리안테르의 하늘 위에 마치 영화처럼 과거가 비춰졌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죽였다.
그곳에는 그들이 잊고 있던 자신들의 과거가 있었다.
처음 사랑에 빠지던 날,
처음 용서를 구하던 순간,
그리고 처음 세상을 미워했던 기억까지.
모든 감정의 조각들이 다시 살아났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은 불안하게 깜빡였다.
기억이 너무 많이 깨어났던 것이다.
리안테르의 공기 속에는 수천만 개의 감정이 뒤섞였고, 서로의 파동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웃고 있었지만, 그 옆의 사람은 이유 없이 울고 있었다.
아이들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혼란을 겪었고, 노인들은 오래전 잊었던 슬픔을 다시 느꼈다.그날 밤, 도시 전체가 진동했다.
하늘의 별들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고, 감정의 나무가 검은 그림자를 흘렸다.
그 그림자 속에서 또 한 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감정의 무게가 너무 커요. 이대로면 이 도시가 무너져요.”
그건 세린의 목소리였다.
무음의 아이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럼 감정을 버려야 하나요?”
— “아니, 나누어야 해요. 감정은 소유하면 무게가 되고, 나누면 파동이 돼요.”그 순간, 아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는 손을 하늘로 들어 올렸다.
“그럼 이제, 나의 감정을 나눌게요.”그 말과 함께 그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은 어떤 신성함도, 위대함도 없었다.
그저 인간의 온도였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용서하고 싶었던 마음,
그리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그 빛은 도시 전체로 퍼졌다.
건물의 벽이 숨을 쉬듯 흔들렸고, 강물이 노래하듯 반짝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동자에 하나의 장면이 비쳤다.
바람 속에서 웃고 있는 로안,
그 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세린,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는 엘라,
그리고 그들 모두를 바라보는 무음의 아이.루디안의 제자였던 타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자신을 나누고 있어. 감정을 도시 전체로 흩뿌리고 있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타렌은 고개를 숙였다. “그 아이는… 곧 사라질 거야.”하지만 아이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몸이 점점 빛으로 흩어지면서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감정이 흐르는 한,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을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번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수많은 빛의 조각이 흩어졌다.
그 조각들은 거리마다, 벽마다, 나무의 잎마다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새로운 형태를 만들었다.도시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형의 구조물이 생겨났다.
그것은 돌이 아니었고, 금속도 아니었다.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였다.
수많은 빛이 그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고, 그 소리는 심장의 박동처럼 울렸다.타렌은 그 구조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건 아이의 마지막 흔적이야.
그는 감정을 남긴 게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감정화’시켰어.”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매일 밤 그 구체 앞에 모였다.
누군가 슬픔에 잠기면 그 구체가 푸르게 빛났고,
누군가 기뻐하면 금빛으로 반짝였다.
사람들은 그 빛을 보며 서로의 마음을 느꼈다.그날 이후 리안테르는 ‘공명 도시’라 불렸다.
감정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모두의 것이 되었고, 모두가 그 안에서 연결되어 있었다.밤이 깊어지자, 하늘의 별들이 다시 하나씩 켜졌다.
그 별들 중 하나가 유난히 밝게 빛났다.
그건 무음의 아이가 남긴 별이었다.
도시의 사람들은 그 별을 ‘기억의 별’이라 불렀다.그리고 누군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저 별은 말이 없지만, 모든 감정을 기억하고 있지.”그날 리안테르의 공기가 처음으로 울음을 삼켰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동시에 존재하는,
진짜 살아 있는 감정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감정은 나누어질 때 완전해진다.
그리고 기억될 때, 영원해진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