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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9부 : 첫 번째 추적자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16:33반응형
리안테르의 새벽은 평소보다 밝았다. 그러나 그 빛은 태양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감정검열국의 순찰 드론이 새로 배치된 탓이었다. 하늘에는 기계의 눈이 촘촘히 떠 있었고, 거리의 전광판에는 반복되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감정은 불안을 낳는다. 감정은 질서를 해친다.” 사람들은 그 문장을 들으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다른 말이 자라고 있었다. “감정은 생명을 만든다.” 그것은 더 이상 소리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눈빛과 손끝으로 이어지는 비밀의 언어였다.
엘라 미렌은 그날도 조용히 교실 문을 열었다. 아이들은 이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수업 주제는 ‘기억’. 감정검열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엘라는 칠판에 단어 하나를 썼다. “기억은 빛보다 오래 남는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이 문장을 마음에 새기세요. 잊지 않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아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창문 밖에서 금속성 진동이 울렸다. 감시 드론의 그림자가 교실을 스쳤다. 엘라는 미세하게 숨을 멈추었다.
그 순간, 교무실 방송이 울렸다. “D-구역 교사 엘라 미렌. 즉시 행정실로 오세요.” 아이들의 얼굴이 굳었다. 엘라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요. 잠깐 이야기하고 올게요. 오늘은 복습만 하세요.” 그녀는 교실을 나서면서 로안의 눈을 잠깐 바라봤다. 소년의 눈빛은 두려움보다 결심에 가까웠다.
행정실 문이 닫히자, 회색 제복의 관리관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하르브가 서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그는 예전보다 훨씬 차가워 보였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미렌, 우리는 최근 D-구역 내에서 감정 반응의 집중 현상을 포착했습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있을 뿐이에요. 감정 반응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자연스러움은 통제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하르브는 손에 든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화면에는 교실 내 감정지표의 그래프가 떠 있었다. 그 곡선은 완만하지 않았다. 수치가 일정하게 상승하다 어느 날 갑자기 폭발하듯 치솟아 있었다. “이건 통상적인 오류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건 아이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에요.” 엘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당신도 알잖아요. 죽은 도시는 오래 버티지 못해요.”
하르브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누군가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나도 더 이상 막아줄 수 없어요.” 엘라의 심장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검열국 내부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더 잔혹해요. 그중 한 명이 당신을 쫓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쪽을 바라봤다. “그가 이미 도착했군요.”
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 눈빛은 비어 있었고, 걸음은 정확했다. “감정검열국 특별조사관 루디안 크로스.” 그는 자신을 소개하며 차갑게 말했다. “당신이 엘라 미렌이군요. 최근 D-구역에서 발생한 감정 확산의 원인으로 지목됐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하르브의 표정이 굳었다. “루디안, 이건 내가 처리하겠다.” 그러나 루디안은 미소도 없이 대답했다. “이미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감정 확산자는 ‘관찰’이 아니라 ‘제거’의 대상입니다.”
엘라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물었다. “감정을 제거한다는 건 결국 인간을 지우겠다는 뜻이죠?” 루디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감정이 사라지면 고통도 사라집니다. 그게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입니다.” “그건 평화가 아니라, 죽음이에요.”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하르브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렌, 도망치세요. 지금 바로.”
엘라는 순간 몸을 돌렸다. 루디안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따라왔지만, 그녀는 이미 복도를 달리고 있었다. 경보음이 울렸다. 교사들과 학생들이 놀라서 문을 열어봤지만, 엘라는 이미 1층 계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감정감지기가 일제히 붉게 깜빡였다. 그녀의 심장이 그 어떤 기계보다 빨리 뛰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순간, 눈앞의 거리에는 순찰 드론들이 줄지어 있었다. 엘라는 숨을 고르고 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발밑의 물웅덩이가 터졌다. 빗방울 대신 경고음이 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 익숙한 손이었다. “엘라.” 레오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끌어당겼다. “이쪽이야. 시간 없어.” 그녀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그들은 어떻게…” “우릴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멀리 가지 못했어. 나를 믿어.”
그들은 골목을 빠져나와 하수도 통로로 내려갔다. 그곳은 오래된 도시의 폐허였다. 한때 음악회가 열렸던 장소, 지금은 감정검열국의 지하 저장고 바로 아래였다. 레오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우릴 쫓는 자가 나타났어. 루디안. 그는 감정이 없는 인간, 검열국이 만들어낸 완전한 도구야.” 엘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첫 번째 추적자군요.”
레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우린 그를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그가 보기 전에 증거를 퍼뜨릴 수는 있어요.” “감정의 기록자 말인가요?” “그래요. 하르브가 남긴 메모리. 그걸 도시 전역에 전송할 겁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감정을 기억하게.”
엘라는 오르골을 꺼냈다. 그 안에 숨겨둔 메모리칩이 있었다. “이걸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아요.” 레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시작이 될 겁니다.”
위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명령어를 전달하는 기계음. 루디안의 목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도망칠 수 없습니다. 감정은 결국 자신을 배신하죠.” 레오는 엘라의 손을 잡았다. “당신이 그걸 반증해요. 감정은 배신하지 않아요.”
물결이 흔들렸다. 빛이 지하 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엘라는 오르골을 돌렸다. 음악이 울렸다. 루디안이 총구를 들이댔지만, 그 멜로디는 총성보다 빨랐다. 그 소리는 통신망을 타고 도시 전역으로 흩어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슬펐지만, 그건 나의 일부였다.” “나는 웃었다. 그리고 그게 죄라면, 기꺼이 짓겠다.” “나는 살아 있다.”
루디안의 손이 멈췄다. 그의 눈이 흔들렸다. 감정이 없던 그의 뇌파가 미세하게 반응했다. 그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기억’이었다. 그가 아주 어릴 적 들었던 어머니의 자장가. 그것이 그를 흔들었다.
엘라와 레오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레오가 속삭였다. “이건 끝이 아닙니다.” 엘라가 대답했다. “아니요. 이제 시작이에요.”
지하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것은 진짜 하늘의 빛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누군가의 감정이 만든 빛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도시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감정의 불씨가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리안테르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박동을 멈추지 않으려는 단 한 사람, 첫 번째 추적자 루디안조차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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