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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7부 : 감정의 기록자
    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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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도시는 다시 평온을 되찾은 듯 보였지만, 그것은 표면의 이야기였다. 거리의 스피커에서는 매일같이 같은 문장이 반복되었다. “질서는 행복을 낳는다. 감정은 혼란을 낳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예전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누군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고, 누군가는 이유 없는 눈물을 흘렸다. 감정감지기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이미 시스템보다 한 발 앞서 움직이고 있었다.

    엘라 미렌은 빛의 언덕에서 돌아온 후, 더 이상 예전의 교사로 남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의 교실은 더 이상 단순한 수업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감정을 배우는 비밀의 기록소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교과서를 펴고 필기하는 척했지만, 실제로는 작은 쪽지에 자신이 느낀 감정을 기록했다. “오늘은 바람이 기분이 좋았어요.” “누군가가 나를 봐줬어요.” “두려웠지만,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그 문장들은 허락되지 않은 언어였지만, 그들의 세계에서는 가장 순수한 진실이었다.

    엘라는 그 쪽지들을 모두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기 시작했다. 그 책의 이름은 ‘감정의 기록자’였다. 표지는 회색이었고, 아무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의 글자들은 생생히 살아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밤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며, 각 감정이 남긴 진동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남긴 증거였다.

    어느 날, 학교에 낯선 인물이 찾아왔다. 검은 외투를 입은 남자, 하르브였다. 그는 교육관 문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엘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브는 교실을 둘러보며, 아이들이 남긴 문장을 하나씩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훨씬 복잡했다. “이게 다 아이들이 쓴 겁니까?” “네. 배운 걸 적은 겁니다.” “무엇을 배웠습니까?” 엘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두려움을 느끼는 법, 그리고 그걸 숨기지 않는 법.” 하르브는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당신은… 내가 설계한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군요.” 엘라는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 만든 질서는 이미 부서졌어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하르브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미렌, 이건 단순한 반역이 아닙니다. 감정은 불씨예요. 불씨는 따뜻하지만, 도시를 태우기도 하죠.” 엘라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불을 끈다고요? 결국 어둠뿐이에요. 하지만 빛은 스스로 타오릅니다.” 그 말에 하르브는 처음으로 미세하게 웃었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군요. 감정이 이렇게 무섭다는 걸 만든 장본인인데도.”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낡은 메모리칩이었다. “이건 내 기록이오. 감정검열국이 생기기 전, 내가 만들던 초기 데이터의 일부지. 나는 그때 ‘인간의 감정’을 제거하는 대신 기록하려 했어. 하지만 정부가 그걸 이용해 감시 체계를 세웠지.”

    엘라는 그 메모리를 받아 들었다. “이걸 왜 저한테?” “누군가는 진짜 기록을 이어가야 하니까.” 하르브의 눈빛은 어딘가에서 이미 결심을 끝낸 사람의 것이었다. “당신이 하는 일은 언젠가 나를 없애겠지만, 그게 옳아요. 나를 지워야 도시가 기억을 되찾겠죠.” 엘라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바라보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아직 두려워합니까?” 하르브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움도 감정이죠. 그리고 나는, 이제 그것도 잃고 싶지 않소.”

    그가 떠난 뒤, 엘라는 메모리칩을 오르골 안에 숨겼다. 그 안에는 수많은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사랑한다.” “그리워.” “미안해.” “행복해.” 그 모든 단어들이 금지된 시대의 조각이었다. 엘라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전광판이 또다시 번쩍였다. — “빛은 감출 수 없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 문구를 보고 두려워했지만, 곧 그 문장을 입술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엘라는 ‘감정의 기록자’의 마지막 장을 채웠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이렇게 썼다.
    “오늘 나는, 한 인간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바깥에서는 다시 경보가 울렸다. 검열국이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엘라는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오르골을 품에 안고 창문을 열었다. 잿빛 하늘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이 기록을 읽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속삭였다. “레오, 하르브, 그리고 이 도시의 모든 사람들… 이제 당신들의 감정은 기록되었어요. 잊히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오르골을 돌렸다. 멜로디가 시작되자, 도시의 전파망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리고 리안테르 전역에 퍼진 단 하나의 문장.
    — “우리는 살아 있다.”

    그 소리가 멈춘 뒤에도, 도시의 공기는 한참 동안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공기의 진동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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