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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4부 : 잿빛 도서관의 아이들빛의 언덕에서 2025. 10. 13. 12:38반응형
별이 내린 밤 이후, 리안테르는 겉보기엔 평화로웠다. 거리마다 음악이 흘렀고, 광장에는 웃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아래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감정이 돌아온 도시는 이전과 달리 불완전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었고, 사랑과 증오가 얽혀 있었다. 감정이 인간을 살게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루디안이 남긴 빛의 신호가 하늘을 갈랐던 그날 이후, 검열국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과거의 시스템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유령망’이라 불렀다. 끊어진 감정억제 서버의 일부가 스스로를 복구해, 특정 구역의 정보를 다시 수집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데이터 복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것은 감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 눈물, 분노, 설렘—all of it. 그리고 그 모든 데이터가 모여드는 장소가 있었다. 잿빛 도서관.
리안테르 남부, 도시의 폐허가 된 구 구청 건물 지하. 오래된 터널을 따라 들어가면, 금속 문 하나가 있다. 그곳이 바로 감정의 잔향이 모이는 곳이었다. 도시의 아이들 사이에서 그곳은 전설처럼 전해졌다. “밤마다 도서관에서 목소리가 들려.” “그건 과거의 사람들 이야기가 아니야,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야.” 아이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한 소녀만은 달랐다. 나에라.
나에라는 로안이 가르치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아직 열세 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어느 날, 그녀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로안 선생님, 감정은 왜 이렇게 무거운 거예요?”
로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감정은 기억이기 때문이야. 잃은 걸 기억하는 건 언제나 무겁지.”
“그럼… 그 기억을 덜어낼 방법은 없어요?”
로안은 미소 지었다. “덜어내는 게 아니라, 나누는 거야.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조금은 가벼워지지.”그날 밤, 나에라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대신, 직접 기억의 무게를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녀는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남쪽 터널로 향했다. 도시의 불빛이 희미하게 멀어지고, 발밑에서는 금속이 삐걱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그 문을 보았다. 낡은 철제 문,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여기, 모든 감정은 잠들지 않는다.”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왔다. 어둠 속에는 수많은 구형 데이터코어가 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반딧불처럼 희미하게 깜빡이며, 하나하나가 다른 색의 빛을 냈다. 푸른빛은 그리움, 붉은빛은 분노, 노란빛은 사랑, 흰빛은 슬픔이었다. 나에라는 손끝으로 하나를 건드렸다. 그러자 갑자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어. 그래서 매일 그 이름을 속으로 부르고 있어.”
그건 오래된 음성이었다. 나에라는 놀라 손을 떼었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야.”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코어들 사이를 지나며 수많은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 울음, 속삭임, 고백, 후회, 다짐. 그것은 마치 인간의 심장이 공간 속에서 박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가운데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다른 코어들과 달리 완전히 꺼져 있는 검은 구체 하나. 아무 빛도 없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나에라는 그것을 들여다봤다. 그 순간, 짧은 전류가 손끝을 스쳤다.
— “여기… 있구나.”그건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낮고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슬펐다.
— “넌… 누구야?”
나에라가 속삭였다.
— “나는 이 도시의 첫 번째 목소리야. 레오 알라리스.”순간, 공기가 멈췄다. 모든 코어의 빛이 동시에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 “이 도서관은 우리가 만든 노래의 그림자야.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완전히 해방되지도 않았어. 그걸 완성해야 해. 너는… 그 마지막 열쇠야.”나에라는 손을 움켜쥐었다. “저는… 그냥 아이예요.”
— “그럼 아이답게 하렴. 느껴라, 그리고 믿어라. 감정은 다시 태어나야 하니까.”그 순간, 코어들이 하나둘씩 밝게 빛났다. 나에라의 주변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음악이 흘러들었다. 수천 개의 멜로디가 겹치며 하나의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레오의 노래이자 엘라의 가르침, 루디안의 속죄, 로안의 신념이 섞인 음이었다.
“빛의 언덕…”
그녀가 속삭이자, 도서관의 천장이 흔들렸다. 먼지가 흩어지고, 금속 벽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그 빛은 도시 위로 솟구쳤다. 그리고 리안테르 전역의 통신망이 다시 깨어났다. 스피커마다 동일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이건 오래된 이야기예요.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감정은 기억이고, 기억은 생명이에요. 우리 모두는 노래의 조각이에요.”도시는 다시 빛으로 덮였다. 사람들은 길 위에 멈춰 섰고, 아이들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날 밤, 리안테르의 하늘은 처음으로 ‘별빛’이 아닌 ‘감정의 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광장에서 한 소녀를 발견했다. 조용히 잠든 나에라. 그녀의 손에는 부서진 검은 코어가 있었다. 그것의 표면에는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감정은 잊히지 않는다. 단지, 다음 세대의 목소리로 이어진다.”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매년 그날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감정의 부활절.’
그날 밤이 오면, 도시의 모든 스피커에서 자동으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의 멜로디. 그리고 그 위로 겹쳐지는 어린 목소리.
“이건 우리의 노래예요. 잿빛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어요.”리안테르는 다시 노래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형태를 바꾸어, 또 다른 세대의 심장 속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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