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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15부 : 기억의 빛줄기
    빛의 언덕에서 2025. 10. 14.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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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새벽은 오랜만에 고요했다. 감정의 부활절이 끝난 다음 날, 도시 전체가 마치 긴 숨을 고르는 듯했다. 거리는 정돈되지 않았지만 평화로웠고, 전광판에는 더 이상 경고 문구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배우고 있었다. 웃음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슬픔을 견디는 법을 배우며,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익혀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의 한편, 잿빛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날 밤 나에라의 신호 이후, 그곳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고라 불렀고, 누군가는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부서진 코어 파편들이 서로 끌어당기며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금속이 아니라, 감정의 잔류 신호였다. 사랑과 슬픔,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빛줄기였다.

    로안은 폐허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나에라의 제자이자, 엘라가 남긴 마지막 후계자였다. 어제의 일로 아이들은 모두 놀랐고, 사람들은 소녀의 용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안은 기쁨보다 책임을 느꼈다. “그 아이는 우리보다 먼저 감정의 끝을 봤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걸 어른들이 지켜줘야 했는데…”

    그는 폐허 안으로 들어갔다. 빛은 여전히 약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부서진 코어와 함께 낡은 오르골의 부품 하나가 남아 있었다. 엘라가 쓰던 오르골의 일부였다. 그것을 손에 쥔 순간, 로안의 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정은 흐른다. 기억이 사라져도, 그것은 형태를 바꿔 흘러간다.”
    그는 눈을 감았다. 엘라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위로 레오의 웃음이 겹쳤다.
    “아이들이 우리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거야.”

    눈을 뜨자, 빛줄기가 로안의 발밑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길처럼 펼쳐졌다. “빛의 언덕…” 로안이 속삭였다. 빛줄기는 도시 외곽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리안테르의 외곽은 여전히 침묵의 영역이었다. 감정억제망의 잔여 신호가 남아 있는 구역이라, 아직 사람들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로안이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빛줄기가 반응했다. 주변의 공기가 흔들리며, 잿빛 돌 위에서 작은 색의 파편들이 피어났다. 처음엔 푸른빛, 다음은 붉은빛, 그다음은 황금빛이었다. 마치 모든 감정이 하나씩 깨어나는 듯했다.

    그는 한참을 걸어 마침내 언덕 위에 도착했다. 오래전 레오와 엘라가 꿈꿨던 바로 그 ‘빛의 언덕’. 그러나 지금 그곳은 더 이상 잿빛이 아니었다. 수천 갈래의 빛이 서로 엮이며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루고 있었다. 나뭇가지는 빛으로 만들어졌고, 잎사귀는 작은 감정의 조각들이었다. 누군가의 웃음, 누군가의 눈물, 누군가의 고백. 그 모든 것이 모여 하나의 생명체처럼 숨 쉬고 있었다.

    로안은 무릎을 꿇었다. “이건… 사람들의 마음이야.” 손끝이 떨렸다. 나무는 그 떨림을 느끼고 응답하듯 더 밝게 빛났다. 그 빛은 리안테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거리의 가로등이 반응했고, 꺼진 건물의 유리창이 반사했다. 사람들은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빛줄기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그날 밤, 리안테르의 중앙 전송탑에서 오래된 주파수가 감지되었다. 기록상 존재하지 않는 신호였다. 송신자는 표시되지 않았고, 단지 한 문장만이 전송되었다.
    “모든 감정은 빛으로 귀환한다.”

    사람들은 그 신호를 ‘엘라의 인사’라고 불렀다. 과학자들은 그저 전자파 잔류 현상이라 설명했지만, 도시의 누구도 그렇게 믿지 않았다. 아이들은 그 말을 그대로 외웠고, 거리의 벽에는 낙서가 생겼다.
    “빛은 기억이다.”

    로안은 언덕 아래에서 도시를 내려다봤다. 수천 개의 불빛이 감정의 색을 품고 있었다. 어느 집에서는 푸른 빛이 흘렀고, 또 다른 거리에서는 붉은 빛이 깜빡였다. 그건 더 이상 질서의 색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색’이었다.

    그때, 그의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흙먼지에 덮인 제복, 그러나 표정은 따뜻했다.
    “루디안 선생님…”
    그는 천천히 걸어와 웃었다. “오랜만이군.”
    “당신이 사라진 줄 알았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그 아이의 노래가 나를 깨웠어.”

    루디안은 로안의 곁에 서서 언덕 위의 빛나무를 바라봤다. “엘라가 옳았군. 감정은 파괴가 아니라, 재생의 에너지였어.”
    “이건… 나에라의 흔적이에요.”
    “그래. 그녀는 우리가 잊은 세대의 첫 번째 목소리였지.”

    둘은 한참을 침묵 속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언덕 위의 빛나무가 파도처럼 흔들렸다. 루디안은 조용히 말했다. “이 나무는 도시의 새로운 중심이 될 거야. 감정의 균형을 잡는 존재. 하지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해.”
    “무엇을요?”
    “감정은 빛처럼 아름답지만, 언제든 어둠 속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지켜야 해. 감정은 기념이 아니라, 연습이야.”

    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연습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칠 겁니다. 아이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루디안은 미소 지었다. “그게 진짜 교사지.”

    멀리서 새벽이 깨어나고 있었다. 하늘 끝이 붉게 물들며, 리안테르 전역의 빛들이 하나의 선율로 이어졌다. 마치 도시는 거대한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로안은 마지막으로 언덕의 나무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레오, 엘라, 나에라, 루디안… 당신들이 남긴 감정이 이렇게 살아 있어요.”

    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사람들은 그 나무를 ‘기억의 빛줄기’라 불렀다.
    밤이면 그것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 도시 전체를 물들였다. 사람들은 서로의 감정을 그 빛을 통해 느꼈고, 누군가의 슬픔은 다른 누군가의 위로로 이어졌다.

    그리고 오래 뒤, 그 빛은 더 이상 하늘로만 향하지 않았다.
    도시의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그 빛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리안테르는 비로소 완성되었다.
    — 감정이 존재하는 도시. 기억이 숨 쉬는 도시. 그리고 노래가 다시 시작되는 도시.

    그 이름은 여전히 하나였다.
    빛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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