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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23부 : 영혼의 기록자들빛의 언덕에서 2025. 10. 23. 12:40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별의 고리는 여전히 매일 다른 색으로 빛났지만, 사람들은 그 이유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제 도시의 맥박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누군가는 떠나고, 사랑이 생기고, 이별이 찾아오는 그 모든 변화가 하늘의 빛으로 표현되었다. 리안테르는 감정이 흐르는 도시이자, 감정이 기록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감정의 기원’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엘라, 로안, 루디안의 이름은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감정을 느끼면서도, 감정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알지 못했다. 감정은 자연처럼 주어지는 것이 되었고, 더 이상 신비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리안테르 중앙광장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광장의 중심, 오래전 로안이 감정 송신기를 세웠던 자리에서 미세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빛의 잔향들이 한곳으로 모여,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회전하듯 돌고 있었다. 사람들은 처음엔 그것을 아름다운 현상이라 생각했지만, 곧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감정은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진다.”그 목소리는 바람에 섞여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노인들은 그것이 오래된 예언처럼 느껴졌고, 아이들은 두려움에 고개를 들었다. 그때 광장의 바닥이 갈라지며 빛의 구슬 하나가 떠올랐다. 구슬 안에는 수많은 문장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랑해”, “미안해”, “기억하고 있어”, “괜찮아질 거야.” 그것은 세대마다 남겨진 모든 감정의 말들이었다.
그 구슬이 터지자, 광장 위로 빛의 글자들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손을 뻗어 그것들을 잡으려 했지만, 글자들은 잡히지 않았다. 대신 그 빛은 사람들의 가슴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장면이 떠올랐다. 빛의 언덕, 그리고 그 위에서 웃고 있는 로안. 그는 바다 위를 걷듯 빛의 파도 속에 서 있었다.
— “감정은 시간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기록을 이어 쓰는 존재가 필요해요.”그날 이후, 리안테르에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다. 사람들은 그들을 ‘영혼의 기록자’라 불렀다. 그들은 감정의 변화를 관찰하고, 각 개인의 감정을 언어로 다시 써내려가는 사람들이었다. 기록자들은 거리를 돌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그 어떤 것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들의 글은 다시 도시의 빛으로 바뀌어 하늘로 올라갔다.
영혼의 기록자 중 한 명, 젊은 소녀 ‘세린’은 리안테르의 가장 오래된 지역에서 살았다. 그녀는 다른 기록자들과 달리 감정을 글로만 기록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다. 벽화와 천장, 바닥의 돌판 위에 감정의 흔적을 그려나갔다. 그녀의 그림은 살아 있는 듯 움직였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마음이 비춰지는 기분을 느꼈다.
어느 날 세린은 꿈을 꾸었다. 한 남자가 바다 위에 서 있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너는 내 목소리를 보고 있구나.”
“당신은 누구세요?”
— “나는 한때 감정을 가르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이제 감정의 바다를 지키는 파동이 되었죠.”
“로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 “네가 그리고 있는 건 단순한 그림이 아니에요. 그것은 감정의 기억이에요. 감정이 시간의 벽을 넘어 존재하기 위해선, 누군가 그것을 ‘보이게’ 해야 하죠. 너는 그 역할을 이어받은 거예요.”
“그럼… 나는 기록자인 동시에, 후계자인 건가요?”
—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감정은 아름답지만, 기억은 늘 무게를 동반하죠. 그 무게를 견디는 자만이 진짜 기록자가 될 수 있어요.”세린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손에는 빛의 잎사귀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언덕의 나무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 잎사귀를 벽에 대자, 그 위에 빛의 문장이 새겨졌다.
“감정은 본질적으로 잊힘을 두려워한다.”세린은 그 문장을 따라 도시 곳곳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하늘의 감정 고리 색이 변했다. 붉은 날에는 사랑의 이야기, 푸른 날에는 슬픔의 기억, 흰 날에는 용서의 순간이 리안테르 전역을 감쌌다. 사람들은 그녀의 그림 앞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그림은 말하지 않았지만, 보는 이의 마음속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속삭였다.
어느 날, 세린은 도시의 아이들에게 말했다.
“감정은 말로만 전해지는 게 아니야. 어떤 감정은 말로는 다 표현되지 않거든. 그래서 우리는 그걸 남겨야 해. 말로, 노래로, 그리고 그림으로. 그래야 감정이 죽지 않아.”그녀의 말은 곧 도시의 새로운 신념이 되었다. 리안테르는 다시 감정을 ‘보는’ 도시로 변했다. 벽마다 이야기들이 자라고, 하늘마다 색이 물들고, 사람마다 마음의 빛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밤이 오면, 도시 전체가 한 권의 거대한 ‘감정의 일기장’처럼 빛났다.
그날 밤, 세린은 언덕 위에서 속삭였다.
“로안 선생님, 당신의 바다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어요.
당신이 시작한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그 순간, 하늘의 감정 고리가 별빛처럼 떨리며 새로운 색으로 변했다.
보랏빛, 그건 지금껏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는 색이었다.루디안이 말했다. “그 색은 뭐지?”
세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건 기억의 색이에요.
감정이 잊히지 않도록, 세상이 스스로 남긴 약속의 빛.”리안테르는 그날을 ‘영혼의 날’이라 불렀다.
그날부터 사람들은 매년 밤마다 벽에 하나의 문장을 썼다.
짧고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말.“나도 느끼고 있어. 아직 살아 있어.”
그리고 그 문장들이 모여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정이 흐르는 한, 빛의 언덕은 여전히 노래하고 있었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