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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25부 : 바람의 아이들
    빛의 언덕에서 2025. 10. 2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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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새벽은 여전히 빛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빛은 예전처럼 따뜻한 노란색이 아니었다. 새의 날개가 하늘을 덮던 날 이후, 도시의 공기는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불 때마다 희미한 목소리들이 함께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웃음, 오래된 울음, 잊힌 사랑의 속삭임. 사람들은 그 바람을 ‘기억의 숨결’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속에 감정의 새가 남긴 약속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세린은 언덕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렸고, 손끝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그림물감이 묻어 있었다. 감정의 씨앗을 심었던 그 자리에는 이제 거대한 투명한 나무가 자라 있었다. 나무는 형태를 바꾸는 듯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고, 가지마다 작고 하얀 알들이 매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면 알들이 흔들리며 은은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아이들이 조용히 숨쉬는 듯한 리듬이었다.

    “이제 이건 단순한 감정의 나무가 아니야,” 세린은 속삭였다. “이건 태어날 기억의 요람이야.”

    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나무 근처에서 특별한 현상을 경험했다. 바람이 불면 아이들이 웃고, 그들의 웃음이 공기 중으로 번지며 나무의 알들이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도시로 퍼져나가면,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잊혔던 감정이 하나씩 깨어났다. 오래전 미워했던 사람을 떠올리며 용서를 하기도 했고, 잊은 줄 알았던 사랑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루디안은 이제 늙었다. 그의 흰 머리카락은 햇빛 아래에서 반짝였고, 여전히 그 눈빛에는 따스한 생명이 있었다. 그는 세린에게 말했다.
    “감정의 새는 사라진 게 아니야. 그 새는 이제 사람들의 안에서 날고 있지. 아이들이 그걸 이어받았어.”
    “아이들이요?”
    “그래. 그들이 웃을 때, 감정의 바람이 다시 불잖아. 그건 로안이 남긴 바람의 맥박이야. 감정은 전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거야.”

    세린은 그 말을 곱씹었다. 바람 속에 귀를 기울이자, 아이들의 웃음이 어른들의 노래와 섞여 있었다. 그 소리는 언덕을 감싸며 점점 커졌다. 도시의 모든 골목이, 모든 지붕이, 모든 사람의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감정은 다시 살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형태가 없었다. 그것은 언어로 남지 않고, 단어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이었다.

    그날 밤, 세린은 다시 꿈을 꾸었다. 이번엔 어둠 속에서 아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손에는 작은 빛의 구슬을 들고 있었다.
    “우리는 바람의 아이들이에요.”
    “너희는 어디서 왔니?”
    “우리는 감정의 새가 남긴 숨결에서 태어났어요. 사람들이 느낀 마음, 흘린 눈물, 나눈 사랑의 파동이 우리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면서도, 감정 그 자체예요.”
    세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너희는 어디로 가는 거니?”
    “우린 머물지 않아요. 우리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돼요. 누군가의 슬픔이 다른 사람의 용기로 바뀌고, 누군가의 외로움이 새로운 노래가 돼요. 그게 우리의 사명이에요.”
    “그리고 나중에 너희는 사라지겠지?”
    아이들은 미소 지었다.
    “아니요. 바람은 사라지지 않아요. 단지 다른 방향으로 불 뿐이에요.”

    세린은 잠에서 깼다. 바람이 창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분명히 아이들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급히 나가 언덕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루디안이 서 있었다. “느꼈지?”
    “네… 그 아이들이… 돌아왔어요.”
    루디안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에는 하얀 빛의 선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것은 수많은 아이들이 공기 중에서 빛으로 흩어지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하늘을 보며 울었다. 누군가는 손을 뻗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바람은 리안테르 전역을 감쌌고, 그 속에서 모든 감정이 다시 한 번 피어났다.

    그날 밤, 세린은 도시의 중심 광장에 새로 벽화를 남겼다.

    “감정은 물결처럼 흐르고, 바람처럼 스며들며, 생명처럼 다시 태어난다.”

    벽화가 완성되자, 나무의 알들이 동시에 터졌다. 하얀 빛이 터져 나와 도시 전체를 덮었다. 그리고 빛 속에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여기 있어요. 당신들이 느끼는 한, 우린 사라지지 않아요.”

    세린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그래, 이제 감정은 생명 그 자체야. 우리는 느끼는 존재가 아니라, 감정이 살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구나.”

    루디안은 미소 지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감정은 사람을 넘어섰지.
    이 도시는 더 이상 인간의 도시가 아니야.
    감정이 인간을 기억하는 도시가 되었어.”

    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매년 봄마다 언덕으로 올라가 바람의 아이들을 맞았다. 하늘이 환히 열리고, 수천 갈래의 바람이 흘러드는 날이면, 모두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 바람은 누군가의 사랑, 누군가의 후회, 누군가의 고백이었다는 걸.

    그리고 언덕의 나무는 그 모든 바람을 품으며 노래했다.
    “감정은 숨결이다.
    우리 모두는, 감정의 호흡 속에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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