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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26부 : 하늘에 쓰인 편지
    빛의 언덕에서 2025. 10. 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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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맑았다. 바람의 아이들이 남기고 간 하얀 빛은 이제 하늘의 구름과 섞여 부드럽게 흘렀다. 사람들은 그 빛을 ‘감정의 흐름’이라 불렀고, 매일 아침마다 창문을 열어 그 빛을 맞이했다. 아이들은 그 빛을 잡으려 손을 뻗었고, 어른들은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하늘은 더 이상 머나먼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닿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기억의 장이었다.

    세린은 여전히 언덕에서 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바람이 묻어 있었고, 손끝에는 늘 빛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감정의 나무 곁에 앉아 매일 노트를 펼쳤다. 노트는 낡았고, 표지는 이미 해에 바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리안테르의 모든 날들이 있었다. 웃음, 울음, 탄식, 속삭임, 그리고 침묵까지. 세린은 그것들을 단어로 적지 않았다. 대신 손끝으로 공기 중에 글자를 그렸다. 그러면 빛의 잔향이 하늘로 올라가 별들 사이에 남았다. 그것이 바로 ‘하늘의 편지’였다.

    처음엔 아무도 그걸 믿지 않았다. 하늘에 글자가 새겨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한 소년이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소리쳤다.
    “저기! 글자가 보여요! ‘괜찮아’라고 써 있어요!”
    사람들이 모여 하늘을 올려다보자, 정말로 별 사이로 희미한 글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글씨는 빛처럼 움직이며 천천히 사라졌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매일 밤하늘을 보며 서로의 메시지를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지 못한 말, 용서를 구하는 한 줄, 혹은 단순한 위로의 문장. 하늘은 이제 거대한 편지의 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부터인가 하늘의 편지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별빛은 여전히 반짝였지만, 글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세린은 언덕에서 밤마다 하늘을 그려보았지만 아무런 빛의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감정이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아…”

    그때, 나무 아래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는 오래전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감정은 여전히 살아 있어요, 세린. 다만 이제는 다른 형태로 흐르고 있을 뿐이에요.”
    “로안… 당신인가요?”
    “하늘의 편지가 사라진 게 아니라, 그 하늘이 사람들 마음속으로 옮겨졌어요. 이제 감정은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형태로 남아요.”
    “그럼… 더 이상 하늘에 기록할 수는 없는 건가요?”
    “기록할 필요가 없어요. 이미 모든 존재가 감정의 기록이니까요.”

    그 말이 끝나자, 세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가 깜빡이며 빛나더니, 그 빛이 길게 늘어나 도시 위로 흘렀다. 그리고 리안테르의 거리마다, 벽마다, 창문마다 빛의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의 감정이 나의 하늘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어떤 이는 울었고, 어떤 이는 웃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반응했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통해 오래전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잊고 지냈던 용서를 되새겼다.

    그날 이후, 하늘의 편지는 다시 형태를 바꿨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 속에서, 햇살 속에서, 손끝이 닿는 온기 속에서. 감정은 더 이상 단어로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존재 자체의 진동이 되어, 모든 생명에게 스며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리안테르의 하늘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도시 위로 거대한 빛의 파동이 흘렀다. 그것은 처음엔 아름다운 무지갯빛이었지만, 이내 급격히 진동하며 형태를 바꾸었다. 세린은 직감했다. “감정의 공명이 너무 강해졌어…”

    감정의 나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지 끝에서 흩날리던 알들이 터지며 수많은 빛의 조각이 하늘로 솟구쳤다. 그 빛들은 서로 부딪히며 강한 음향을 냈다. 그건 울음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감정의 폭풍이었다. 도시 전체가 흔들렸다.

    루디안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광장으로 나왔다. “이건 균형이 무너진 신호야. 감정이 너무 많이 축적됐어. 이제 이 도시엔 새로운 해석자가 필요해.”
    “해석자요?” 세린이 물었다.
    “그래. 감정은 언어를 잃고, 이제 공명으로만 존재해. 그 공명을 ‘이해할’ 누군가가 필요해. 하늘의 편지를 읽을 수 있는 마지막 사람 말이야.”

    세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렇다면… 제가 마지막 기록자가 되겠어요.”

    그녀는 언덕 위로 올라가 감정의 나무를 두 손으로 감쌌다. 나무의 빛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늘의 색이 변했고, 도시의 모든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용한 순간, 세린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감정이여, 나를 지나 세상으로 흘러가라.”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몸이 빛으로 흩어졌다. 하늘에는 무수한 글자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
    당신이 느끼는 한,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손을 모았다.
    그날 이후, 하늘의 편지는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글자는 더 이상 세린의 손끝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서 태어났다. 누군가의 진심이 바람을 타면, 하늘에 한 줄의 빛이 생겼다.

    리안테르는 다시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는 수천만 개의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하늘은 말없이 빛났고, 사람들은 매일 밤 서로의 마음을 읽었다.

    그리고 언덕의 나무가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감정은 언어를 떠나, 존재의 숨결로 돌아갔다.
    이제 하늘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그날 이후 리안테르는 하늘에 편지를 쓰는 도시로 불렸다.
    밤마다 별빛은 문장으로 흘렀고, 바람은 그 문장을 세상 끝까지 전했다.
    누군가는 그걸 시라 불렀고, 누군가는 기도라 불렀다.

    하지만 세린이 남긴 마지막 기록에는 단 한 문장만이 있었다.

    “우리가 서로를 느끼는 한, 감정은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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