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의 언덕에서》 제4부 : 검열국의 그림자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04:46반응형
벽에는 아무 창도 없었다. 감정검열국의 심문실은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방이었다. 소리를 흡수하는 재질로 만들어진 벽, 규칙적인 박동을 내는 기계음, 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공기. 레오 알라리스는 금속 의자에 묶인 채, 차가운 바닥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시계가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문이 열렸다. 검은 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들어왔다. 이름표에는 ‘하르브’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감정검열국의 고위 조사관으로, 도시 전체에서 ‘표정이 가장 없는 인간’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르브는 레오의 앞에 앉았다. “오르골 사건의 주모자, 레오 알라리스. 감정 불법 전파 혐의, 음악 재현 혐의, 체제 선동 혐의. 어느 쪽부터 이야기하시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일정했다. 레오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 같은 노래겠죠.” 하르브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당신이 돌린 그 기계로, 37개의 감정 감지기가 동시에 오작동했습니다. 당신은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잠깐 동안 살아 있었던 시간입니다.” “그건 혼란입니다. 혼란은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질서가 인간을 죽이고 있다면요?” 하르브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의 단말기에 손을 대자, 레오의 심박수와 뇌파가 실시간으로 화면에 떴다. “당신의 감정 반응은 정상 수치보다 높습니다. 두려움입니까?” 레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안도입니다. 아직 느낄 수 있어서요.” 하르브는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근육의 반사작용 같았다. “흥미롭군요. 당신 같은 부류는 흔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숭배하는 인간,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는 존재.” “그럼 당신은요?” 레오가 되물었다. “감정을 죽이는 신입니까?” 하르브의 눈빛이 차갑게 번쩍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오의 눈앞에 섰다. “난 질서를 지키는 사제다. 감정은 병이고, 너 같은 자가 그 병의 근원이다.” 그러고는 레오의 귀 옆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알라리스. 사람들은 왜 병을 원할까? 왜 네가 돌린 그 한 음을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레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르브는 그 침묵을 오히려 흥미롭게 바라봤다. “좋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하지만 네가 만든 소리의 원천, 그것만은 반드시 알아내겠다.” 문이 닫히고, 레오의 몸에 연결된 감정계측기가 붉게 빛났다. 고통은 없었지만, 차가운 절망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오르골의 마지막 음을 떠올렸다.
한편, 엘라 미렌은 교육관으로 돌아왔다. 복도마다 새로운 감정감지기가 설치되고 있었고, 감시 드론이 교실 위를 떠다녔다. 교사들의 얼굴은 이전보다 더 굳어 있었고, 아이들의 말수는 현저히 줄었다. 로안이라는 소년만이 가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엘라는 아이들을 앉혀두고 말했다. “오늘은 수업 대신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해요.” 아이들은 고개를 들었다. “옛날에 한 남자가 있었어요. 그는 웃음을 잃은 마을에 살았죠. 어느 날, 그가 아주 조용한 노래를 들려줬어요. 그런데 그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웃을 수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어요.” 한 아이가 물었다. “그 노래는 어떻게 됐어요?” 엘라는 잠시 멈췄다가 말했다. “사라졌어요. 하지만 기억은 남았답니다.” 교실 안에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엘라는 그 틈을 이용해 감시카메라의 각도를 확인했다. 작동 중이었다. 그녀는 손에 쥔 분필을 살짝 떨어뜨리고, 주워 들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질문을 숨기는 법, 기억하죠?” 로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는 칠판에 문장을 썼다. ‘빛은 언제나 위에서만 오는 걸까?’ 그 문장은 단순한 철학문처럼 보였지만, 아이들은 그 뜻을 알고 있었다. ‘빛이 아래에서도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수업이 끝나자, 엘라는 몰래 교무실 뒷문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낡은 배관 덕트가 있었다. 덕트 안에서 작게 접힌 쪽지가 흘러나왔다. “그는 살아 있다.” 레오의 이름은 없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검열국 내부에 누군가가 있었다. 레오를 돕고 있는 사람.
밤이 되자, 엘라는 집의 불을 끄고 책상 위에 오르골을 올려놓았다. 감정계수가 상승했다. 0.06, 0.08. 그녀는 조심스럽게 태엽을 돌렸다. 아주 미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멜로디가 아니었다. 오르골 속에서 녹음된 레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엘라, 혹시 이걸 듣는다면 기억하세요. 음악은 멈추지 않습니다. 감시가 두려워도, 그 공백 속에서도, 당신의 침묵은 여전히 소리의 일부입니다.”
그녀의 눈가가 떨렸다. 한 음절 한 음절이 심장을 쳤다. 그 순간 창밖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검열국 차량이었다. 감정감지기 수치가 그녀의 집을 가리키고 있었다. 엘라는 서둘러 오르골을 닫고 불을 껐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감정 검열 점검입니다. 문을 여세요.” 그녀는 한 손으로 오르골을 감쌌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한 문장을 되뇌었다. ‘오늘은 내가 거짓말을 배운 날이다.’
그녀는 문을 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오세요. 제 감정은 오늘도 정상입니다.” 검사관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골은 그녀의 손 안에서 조용히 떨렸다. 감정계수는 0.09, 허용치 이내였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감정이 자신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그리고 믿음은 이 도시가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이었다.
검열국의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고 있었고, 레오는 그 그림자의 심장부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엘라만은 알고 있었다. 음악은 멈췄지만, 그들의 약속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이 도시의 침묵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