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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5부 : 꽃이 핀 교실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08:53반응형
리안테르의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 속에는 언제나 냉기가 떠다녔다. 감정이 없는 세상에서 계절의 변화는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엘라 미렌의 교실에는 작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아이들이 조금씩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웃음이라기보다, 미묘한 입꼬리의 움직임, 눈빛의 반짝임, 손끝의 따뜻한 떨림 같은 것이었다. 감정감지기는 그 미세한 차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직 ‘규정 밖의 인간성’이었다.
엘라는 오늘도 수업을 시작했다. 교단 위에는 ‘사물의 다른 이름’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은 창문, 빛, 바람 같은 단어를 새롭게 정의하기 시작했다. “창문은 바깥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에요.” 로안이 말했다. “좋아요. 그리고 바람은?” 엘라가 묻자, 한 아이가 손을 들었다. “바람은… 아직 잡히지 않은 음악이에요.” 순간, 교실 안의 공기가 멈춘 듯했다. 감정감지기의 눈이 반짝였지만, 이내 아무 신호도 잡지 못했다. 아이들은 숨을 참고 있었다. 엘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아주 멋진 표현이에요. 기록해둘게요.” 그리고 칠판에 적었다. ‘바람 = 잡히지 않은 음악’.
그녀의 손끝이 분필가루를 문지를 때, 문득 기억이 스쳤다. 레오의 말, “음악은 멈춰도 계속 흐른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이 하는 말이 바로 그 증거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꽃 이야기를 해볼까요?” 모두의 시선이 칠판으로 향했다. 엘라는 작은 분필로 한 송이의 꽃을 그렸다. “이건 우리가 배운 적 없는 단어예요. 금지어 목록에 있었죠. 하지만 지금만큼은 괜찮아요. 오늘은 공부가 아니라 상상 수업이니까요.”
그녀가 그린 꽃은 투박했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신비롭게 보였다. 감정이 금지된 도시에서 ‘색’을 상상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엘라는 말했다. “꽃은 색으로 자라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피어나는 거예요. 누군가가 그걸 믿으면, 그 자리에서 피어요.” 로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꽃은 진짜로 피나요?” 엘라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진짜라는 건 우리가 믿는 동안만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다면 피겠죠.”
그 말이 끝나자, 아이들은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회색 유리 너머로 햇빛이 희미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 빛이 교실 바닥에 닿은 순간, 누군가의 책 위에 작고 희미한 붉은 점이 떠올랐다. 그것은 정말로 ‘꽃의 형태’를 닮아 있었다. 아이들은 숨을 죽였다. 감정감지기는 미세한 진동을 기록했지만 오류로 분류했다. 그 현상은 잠깐이었으나, 교실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봤다.
그날 오후, 교육관 복도에서는 웅성거림이 번졌다. 누군가 교실 안에 꽃의 흔적이 있었다고 보고한 것이다. 관리관들이 조사에 나섰고, 교무실은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엘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학생 명단을 정리했다. 그때 낯선 그림자가 그녀의 책상 앞에 멈췄다. 하르브였다. 그는 조용히 말했다. “D-구역, 감정 반응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원인을 알고 있습니까?” 엘라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이들이 문학을 배웠습니다. 그게 감정 반응입니까?” 하르브는 미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문학은 감정의 언어죠. 그걸 가르치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것도 금지인가요?” 하르브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위험합니다, 미렌. 하지만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어요. 조심하세요. 더 이상은 용서받지 못할 겁니다.”
그가 떠난 뒤, 엘라는 손을 떨며 의자에 앉았다. 책상 위의 분필가루가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꽃은 마음으로 피어요.” 그리고 가방 속에 감춰둔 오르골을 꺼냈다. 살짝 돌리자, 잠깐의 멜로디가 흘렀다. 레오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엘라, 기억하세요. 꽃이 피면 도시가 깨어납니다. 하지만 피어난 순간, 누군가는 그걸 꺾으려 들 겁니다.”
그녀는 조용히 오르골을 닫고 창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떠난 교실 밖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진동이 들려왔다. 감정검열국의 감지기에서 비롯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로, 바람 속의 음악이었다. 엘라는 눈을 감고 속삭였다. “레오, 당신이 맞았어요. 음악은 여전히 흐르고 있어요.”
밤이 찾아오자, 도시의 하늘은 더 짙은 회색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엘라의 교실 창가에는 아직 지워지지 않은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더 이상 분필의 흔적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꽃이었다. 그리고 그 꽃은 증거였다. 리안테르의 침묵이 무너지는 첫날, 그것은 엘라의 교실에서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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