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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6부 : 빛의 언덕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10:17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지만, 엘라의 마음속에는 작고 미세한 빛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르골의 잔향처럼, 한 번 들으면 사라지지 않는 소리였다. 그녀는 매일 아이들에게 질문을 남겼다. “오늘은 무슨 색의 하늘을 보고 싶나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점점 용기를 냈다. “파란색이요.” “분홍색요.” “검은색도 괜찮아요.” 그들의 대답은 감정감지기의 수치를 조금씩 흔들었다. 시스템은 오류를 반복했고, 관리관들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엘라는 알고 있었다. 아이들의 말이 이미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을.
그날 오후, 교육관으로 긴급 공지가 내려왔다. 감정검열국이 D-구역을 직접 점검하겠다는 명령이었다. 하르브가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교사들은 두려워했고, 아이들은 침묵했다. 엘라는 책상 위에 손을 얹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은 오르골의 무늬를 따라가듯 떨렸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하르브가 들어왔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뭔가 다른 온기가 섞여 있었다. “미렌 교육관, 다시 만났군요.” “점검이라 들었습니다.” “점검일 수도 있고, 대화일 수도 있죠.” 하르브는 교실을 둘러보았다. 칠판 위에는 아이들이 쓴 문장이 남아 있었다. ‘바람은 잡히지 않은 음악.’ 그는 그 문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이건 당신이 가르친 겁니까?” 엘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이들이 쓴 말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기록했어요.” 하르브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분필을 들어 문장 끝에 점 하나를 찍었다. 그 점은 작고, 정확했다. “잡히지 않았다는 건, 언젠가는 잡힐 수도 있다는 뜻이겠죠.” 그의 말에 엘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이 잠시 교차했다. 서로의 말 없는 의도를 읽었다. 그건 위협도 아니고, 완전한 이해도 아니었다. 단지 서로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 위에 서 있다는 걸 알아보는 눈빛이었다.
하르브는 감정계수를 확인했다. 0.05. 허용치 이내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규정 위반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미렌. 이 도시는 감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감정은 사람의 내부에서 시작됩니다. 억제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오만이죠. 나는 그걸 알고 있습니다.” 엘라는 놀랐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요.” 하르브는 그제야 미세하게 웃었다. “이 도시의 시스템을 설계한 건 나였으니까요.” 그리고 그는 돌아서며 말했다. “누군가는 무너뜨려야겠죠. 하지만 그 대가가 당신이라면, 아깝군요.”
그가 떠난 뒤, 엘라는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르브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감정을 설계한 자가 감정을 이해한다는 역설. 그건 어쩌면 레오와 닮은 모순이었다. 인간은 모순 속에서만 진실을 찾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제야 실감했다.
그날 밤, 엘라는 오르골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시 위쪽, 오래된 산등성이가 보였다. 그곳은 리안테르의 외곽지대,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구역이었다. 그러나 레오가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 중 하나에 그 이름이 있었다. ‘빛의 언덕’. 그가 말하던 진짜 하늘, 진짜 자유의 장소. 그녀는 결심했다. 내일, 그곳으로 가겠다고.
다음 날 새벽, 엘라는 가방 속에 오르골을 넣고 교육관을 나섰다. 거리는 정전으로 어두웠고, 감시 드론은 꺼져 있었다. 도시가 정비를 위해 일시적으로 ‘정적 모드’에 들어간 몇 안 되는 시간이었다. 그녀는 신발 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그 길은 길었고, 바람은 차가웠다. 그러나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언덕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완전히 밝아오고 있었다. 잿빛 구름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태양이라기보다, 세상이 아직 포기하지 않은 희망의 흔적 같았다. 엘라는 숨을 고르고 오르골을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태엽을 돌렸다. 소리가 났다. 아주 작지만 분명한 멜로디. 감정검열국의 센서가 이곳까지 닿지 않는 이유를 그녀는 이제 알았다. 빛의 언덕 위에는 감정의 신호가 뒤엉켜 있었다. 수많은 삭제된 감정들의 잔향이 남아, 기계의 감지를 방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멜로디가 바람을 타고 언덕을 넘어 퍼졌다. 그 순간, 멀리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라.” 그것은 레오의 목소리였다. 그는 언덕의 반대편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감정검열국의 수용소에 있던 그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탈출한 듯했다. 얼굴에는 상처가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따뜻했다. “당신이 정말 왔군요.” 엘라는 눈물이 고였다. “빛의 언덕이라더니… 정말로 빛이 있네요.”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빛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에요. 사라진 사람들의 기억이 만든 거예요. 그들이 버리지 않았던 감정, 그게 아직 남아 있는 거죠.”
그들은 나란히 앉았다. 도시의 불빛이 아래쪽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멀리서 경보가 울렸지만, 이곳에는 닿지 않았다. 엘라는 조용히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레오는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이제 감정을 숨기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웃을 때, 아이들이 따라 웃을 거예요. 그게 시작이에요.”
그때, 바람이 불었다. 언덕 위의 풀잎들이 흔들리고, 빛이 더욱 강하게 번졌다. 그것은 마치 잃어버린 하늘이 다시 열리는 순간처럼 보였다. 엘라는 레오의 손을 잡았다. 감정계수가 없다면, 지금의 심장은 몇 배로 뛰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미소 지었다. “이게 바로 진짜 하늘이네요.” 레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가 잊지 않았던 하늘.”
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도시에는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고, 일부 교사들이 눈을 감은 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감정검열국은 그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그 모든 시작이 ‘빛의 언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밤, 도시의 중앙 전광판에 이상 신호가 떴다.
— “빛은 감출 수 없다.”
누가 보낸 메시지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문장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남았다. 그것은 체제를 흔드는 반란의 시작이자, 잊혀졌던 인간의 부활이었다.엘라는 마지막으로 언덕을 돌아보았다. 바람 속에서 오르골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녀는 속삭였다. “레오, 이제 진짜 음악이 시작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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