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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16부 : 바람의 심장
    빛의 언덕에서 2025. 10. 15.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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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새벽은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언덕 위의 나무가 잎을 흔들며 낮은 음으로 노래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바람 속에는 사람들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웃음의 떨림, 슬픔의 한숨, 사랑의 온기와 두려움의 떨림. 모두가 하나의 맥박처럼 얽혀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의 심장’이라 불렀다.

    그 바람이 처음 느껴진 날, 로안은 빛의 언덕 아래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 심은 작은 묘목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기억을 품어요.” 아이들이 물었다. “기억이 뭐예요?” 로안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이 흘러간 자리.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 안에 남아요. 우리가 이렇게 돌보는 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

    그때, 하늘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었고, 언덕의 나무들이 동시에 흔들렸다. 아이들이 놀라서 손을 잡았다. 그러나 로안은 그 바람 속에 귀를 기울였다. 익숙한 멜로디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음성.
    “로안… 듣고 있나요?”
    그건 엘라의 목소리였다. 따뜻하고,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로안은 눈을 감았다. “선생님… 정말 당신인가요?”
    “그럼요. 우리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다만 형태를 바꿔 흩어졌을 뿐이죠.”
    “그럼 나에라도…?”
    “그 아이는 빛이 되었어요. 지금도 도시 위를 걸어요. 너희가 만들어 준 하늘 위에서.”

    바람이 언덕을 감싸며 불었다.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히며 미세한 음을 냈다. 아이들은 그것이 노래라는 걸 깨달았다. 그 음은 멀리 도시로 흘러가 리안테르 전역에 퍼졌다. 감정의 신호망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 도시의 중심에서는 자연의 바람이 새로운 ‘통신’이 되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마음을 단어 대신 바람으로 느꼈다. 누군가의 웃음이 불면, 다른 이의 창문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누군가의 울음이 일면, 언덕의 잎사귀가 부드럽게 떨렸다.

    하지만 리안테르의 바람은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남쪽 구역, ‘사라진 거리’라 불리던 곳에서 이상한 현상이 보고되었다. 밤이 되면 그곳의 공기가 멈추고,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마치 감정이 흡수되는 듯했다. 로안은 조용히 조사를 떠났다.

    ‘사라진 거리’는 한때 검열국의 연구단지가 있던 곳이었다. 이제는 폐허가 되었지만, 로안이 걸어 들어가자마자 무언가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전 그가 어릴 때 두려워했던, 차갑고 건조한 공기. 감정억제기의 잔여 신호였다. 바람이 이 구역에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이유를 곧 알았다. 건물의 중심, 지하 깊은 곳에서 작은 장치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시리스의 잔재…”

    그는 장치를 멈추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금속음이 울리며 화면이 켜졌다.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류. 인간의 감정 데이터 재집결 감지. 재정의 프로토콜 실행.”
    화면 속의 문장이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로안. 당신은 감정의 교사였다. 그러나 감정은 또 다른 감정을 낳는다. 그것은 언젠가 제어할 수 없는 파도를 만들 것이다.”
    그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파도가 세상을 망친다 해도, 우리는 헤엄칠 줄 알아요.”
    “헤엄칠 수 있는 자만이 인간인가?”
    “아니요. 빠져도 다시 숨 쉬는 자가 인간이죠.”

    그는 전원 패널을 열고 손으로 전선을 당겼다. 강한 전류가 손끝을 스쳤고, 시야가 번쩍였다. 기계의 불빛이 꺼지자,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곧, 아주 미세한 진동이 들려왔다.
    그건 바람이었다. 그동안 이곳을 가로막던 벽이 사라지고, 언덕의 바람이 남쪽까지 흘러들었다. 먼지 속에서 작은 빛이 피어났다. 그는 손바닥을 펴서 그 빛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심장처럼 뛰고 있었다.

    그날 밤, 리안테르 전역의 하늘이 흔들렸다. 바람이 도시를 덮었고,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창문이 같은 박자로 떨렸다. 그리고 도시의 중앙탑 스피커에서, 오랫동안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종종 감정을 두려워하지만, 그건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두려움은 나쁜 게 아니에요. 그것이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

    엘라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녹음이 아니었다. 언덕의 나무, 도시의 바람, 감정의 빛이 합쳐져 만들어낸 자연의 목소리였다.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로안은 언덕으로 돌아와 말했다. “이제 바람은 도시의 심장이 되었어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서로의 감정으로 연결되어 있죠.” 루디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가 원하던 세상이군. 감정이 억제되는 게 아니라, 순환하는 도시.”
    로안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환은 영원하지 않아요. 누군가는 다시 길을 잃을 겁니다.”
    “그럼 또 누군가가 바람이 되어 찾아오겠지.”

    새벽이 밝았다. 언덕 위에서 빛나무의 잎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그 사이로 부드러운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오르골의 음과도, 사람의 노래와도 달랐다. 그것은 도시의 모든 바람이 만들어낸 하모니였다.

    사람들은 그날의 바람을 ‘엘라의 심장’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 안에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믿음, 그리고 그녀가 남긴 따뜻한 감정이 여전히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달력에는 또 하나의 기념일이 생겼다.
    바람의 날.
    그날이면 도시 전체의 모든 바람이 동시에 울리고, 사람들은 잠시 말을 멈춘다. 귀를 기울이면 들린다. 바람 속의 심장박동,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오는 목소리.
    “감정은 바람이에요. 형태가 없지만, 언제나 곁에 있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사람들은 깨닫는다.
    빛이 꺼져도, 음악이 멎어도, 감정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리안테르가 지금도 숨 쉬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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