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의 언덕에서》 제18부 : 잃어버린 언어의 계절빛의 언덕에서 2025. 10. 17. 12:50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은 유난히 고요했다. 그림자의 노래가 울린 지 반년이 흘렀고, 도시는 새로운 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화 속엔 묘한 공허가 있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큰 소리로 웃지 않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적당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감정의 폭풍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조율된 세계. 그러나 로안은 그 고요함이 불길했다.
그는 강의실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규칙적으로 웃었고, 정해진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음이 틀리지 않았지만, 그 노래에는 온기가 없었다. 로안은 속삭였다. “이건 조율이 아니라, 침묵의 모양이야.”
최근 들어 도시 전역에서는 ‘감정의 단어’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사랑, 두려움, 그리움, 고통, 용기 같은 단어들이 교과서에서 빠져 있었다. 대신 ‘안정’, ‘조화’, ‘균형’이라는 단어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그런 단어로만 대화했다. “오늘은 감정이 고요하네요.” “당신의 파동이 안정적이에요.” 그들의 말에는 의미가 있었지만, 진심이 없었다.
로안은 이상함을 느끼고 감정 기록국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미르를 다시 만났다. 그녀는 예전보다 훨씬 창백했다. “로안, 당신이 온 걸 알고 있었어요.”
“이건 당신이 만든 균형입니까?”
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의 폭주를 막기 위해 필요했어요. 당신도 봤잖아요. 사람들이 감정을 감당하지 못할 때 세상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하지만 지금은 감정이 아니라 단어가 사라지고 있어요. 언어가 감정을 잃으면, 인간도 감정을 잃어요.”
“그럼 당신은 혼란을 택하겠다는 겁니까? 다시 울부짖고, 싸우고, 절망하자는 겁니까?”
로안은 단호히 말했다. “그래요. 울고, 싸우고, 절망하더라도 그게 살아 있다는 증거예요.”그의 말이 끝나자, 미르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럼 당신에게 보여줄 게 있어요.” 그녀는 그를 지하로 이끌었다. 오래된 통로 끝에는 거대한 홀이 있었다. 그 안에는 수백 개의 수정구가 떠 있었다. 그것들은 부드럽게 빛나고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로안은 섬뜩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안에는 사람들의 언어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건…”
미르는 조용히 말했다. “사라진 단어들이에요. 감정이 폭주했던 시절의 언어들. 너무 강해서, 사람들을 파괴했던 문장들이죠. 그래서 제거했어요. 하지만 완전히 없앨 순 없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보관하는 거예요. 위험한 말들.”로안은 수정 하나를 손에 올렸다. 그 안에서 희미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그리워요.”
그 목소리는 아주 조용했지만, 로안의 심장을 관통했다.
“이건 위험하지 않아요. 그리움은 사람을 살게 해요.”
“아니요.” 미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움은 과거를 불러요. 그리고 과거는 고통을 불러요. 감정은 다시 혼란을 낳아요.”
“그럼 당신은 감정을 지키려다가 결국 감정을 죽이고 있는 거예요.”그 순간, 로안의 손에서 수정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르는 놀라며 외쳤다. “안 돼! 그건 불안정해!” 그러나 이미 늦었다. 수정이 터지며 빛이 방 안을 채웠다. 그리고 수백 개의 수정이 동시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빛과 소리가 폭발하듯 퍼지며, 홀 안이 마치 수천 명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사랑해.”
“두려워.”
“잊지 못해.”
“살고 싶어.”
“용서할 수 없어.”
그 모든 단어들이 살아 움직였다. 공기가 울리고, 벽이 진동했다. 미르는 귀를 막았다. “너무 강해! 이건 폭주야!”
로안은 눈을 감고 말했다. “아니요, 이건 회복이에요. 우리가 잃어버렸던 언어의 귀환이에요.”빛이 꺼지고 난 뒤, 홀은 조용했다. 그러나 공기 속에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심장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수정이 있던 자리에서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감정은 언어를 잃으면 죽고, 언어는 감정을 잃으면 무의미하다.”로안은 그 문장을 천천히 되뇌었다. “그래, 우리는 말을 잃은 게 아니라, 의미를 잃은 거였어.” 그는 고개를 들어 미르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로안, 난 그저 모두를 지키고 싶었어.”
“그럼 이제 지켜야 할 건 질서가 아니라, 단어예요. 감정이 머무를 수 있는 언어를.”그날 이후, 리안테르에는 새로운 학교가 생겼다. ‘감정어 복원소’. 잊힌 단어들을 되살리고, 사라진 말들의 의미를 되찾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사랑해’, ‘그리워’, ‘미안해’ 같은 말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점점 그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아이들은 다시 시를 썼다. 어른들은 다시 편지를 썼다. 거리에는 손글씨로 써 내려간 짧은 문장들이 붙었다.
“감정은 문장보다 길고, 침묵보다 깊다.”리안테르의 사람들은 드디어 깨달았다.
감정은 빛처럼 반짝이고, 그림자처럼 사라지지만, 언어가 그것을 기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원해진다는 것을.그리고 로안은 마지막으로 빛의 언덕에서 바람을 들으며 속삭였다.
“우린 다시 말을 배웠어요, 선생님. 이제 세상은 침묵이 아니라, 목소리로 살아가요.”그날 밤, 하늘엔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별 하나가 새로 떴다.
그 별의 이름은 ‘엘라’였다.
그녀가 남긴 노래는 이제, 언어로 완성되고 있었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