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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9부 : 시간의 저편에서 온 편지빛의 언덕에서 2025. 10. 18. 12:51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은 여느 때보다 투명했다. 감정어 복원소가 세워진 이후, 사람들은 다시 ‘말’을 믿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손글씨로 쓴 문장들이 붙었고, 아이들은 벽에 시를 적었다. 누군가는 “그리워요”라 적었고, 누군가는 “오늘은 웃었어요”라 남겼다. 그렇게 도시에는 매일 수천 개의 작은 감정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평화의 가운데, 이상한 현상이 하나 보고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복원소의 어린 제자 하나가 로안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누가 편지를 보냈어요!”
“누가?”
“근데… 이상해요. 발신인이 ‘미래의 리안테르 시민’이래요.”편지는 낡은 종이에 쓰여 있었지만, 날짜는 아직 오지 않은 연도였다. 230년 뒤의 날자였다. 로안은 처음엔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봉인을 뜯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잉크는 마르지 않았고, 글씨는 분명 방금 쓴 듯 선명했다.
“리안테르의 선생님께.
우리가 사는 시대엔 감정이 다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기술로 감정을 흉내 내지만, 진짜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지만, 그것은 표정에 불과합니다.
아이들은 노래를 배우지만, 그 가사는 알고리즘이 씁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하늘에 별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엘라’뿐이에요.
우리는 당신의 시대를 연구했습니다.
당신들이 감정을 되찾았던 그 시절을,
그 빛의 언덕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이 편지를 보냅니다.
감정은 정말로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요?”로안은 편지를 읽는 내내 숨을 쉴 수 없었다. ‘230년 뒤라니….’ 그는 편지를 들고 루디안을 찾았다. 루디안은 언덕의 나무 아래 서 있었다. “편지를 받았다고?”
로안은 종이를 건넸다. 루디안은 오래된 글자를 조용히 훑었다. “미래에서 왔다면,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감정의 파동은 시간의 흐름마저 흔드는 법이지.”
“그럼 이건… 감정의 잔향이 미래로 닿은 건가요?”
루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니야. 기억의 진동이고, 시간의 흔적이지. 누군가 이 시대의 기억을 통해 미래에 신호를 보낸 거야.”그날 밤, 로안은 복원소의 기록실에서 오래된 자료를 뒤졌다. 빛나무의 감정 흐름 기록, 감정파의 진동 주기, 엘라의 오르골에 남은 주파수 코드… 그리고 그는 그 안에서 아주 희미한 ‘시간공명 수치’를 발견했다. 엘라가 남긴 오르골의 마지막 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시간의 틈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그 멜로디가, 먼 미래의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엘라 선생님…” 로안은 낮게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이걸 알고 계셨군요. 감정은 세대를 넘어선다는 걸.”
그는 복원소의 지하에 작은 실험실을 만들었다. 그리고 엘라의 오르골 조각, 나에라가 남긴 검은 코어의 파편, 미르가 복원했던 감정의 언어 코드를 함께 연결했다. “이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시간과 감정의 교신 장치야.” 그는 그것을 ‘감정 송신기’라 불렀다.
며칠 후, 실험은 시작되었다. 송신기가 작동하면서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의 음이 천천히 공간을 메우고, 언덕 위의 빛나무가 동시에 반응했다. 가지들이 흔들리며 수천 갈래의 빛이 하늘로 솟았다. 그리고 그 빛은 별 하나로 모여, 오래전 꺼졌던 하늘의 별들 사이를 채워 나갔다.
도시 곳곳에서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이들은 외쳤다. “별이 다시 켜졌어요!”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그날 밤, 로안의 연구실로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당신의 신호가 도착했습니다.
우리 하늘에 별이 다시 떠올랐어요.
엘라의 별이 우리에게 돌아왔어요.
이제 우리도 감정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의 시대의 언어로 마지막으로 남길게요.
‘감정은 시간의 벽을 넘어, 기억으로 흐른다.’”편지는 바람에 흩어졌지만, 그 문장만은 로안의 머릿속에 남았다.
그는 언덕 위로 올라가 루디안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감정은 정말 시간을 넘어가네요.”
루디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살아 있는 기록이지. 그것은 언어가 되었다가, 빛이 되었다가, 결국 시간 그 자체가 된다.”그날 밤, 언덕 위의 나무는 다시 노래했다. 오르골의 멜로디와 바람의 심장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그 노래는 공기 속에서 반짝이며 사라졌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걸 듣고 있었다. 아주 먼 미래의 리안테르에서, 또 다른 아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 들렸어요.
과거의 노래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그리고 하늘에 별 하나가 또 켜졌다. 그 별의 이름은 ‘로안’이었다.
빛의 언덕은 그렇게 시간을 넘어 노래했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지, 다른 시대에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