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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21부 : 감정의 바다빛의 언덕에서 2025. 10. 21. 12:38반응형
리안테르의 하늘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건, ‘별의 기억제’가 끝난 지 일주일 후였다. 도시의 중심에서 미세한 진동이 감지되었고, 바람의 방향이 거꾸로 흘렀다. 사람들은 처음엔 단순한 자연현상이라 생각했지만, 곧 이상함을 느꼈다. 하늘의 별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빛의 언덕 아래로 작은 빛의 입자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
로안은 즉시 언덕으로 향했다. 빛나무는 여전히 서 있었지만, 가지 끝의 일부가 흐릿하게 깜빡였다. 그가 손을 뻗자,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그 잎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대신 미세한 물결무늬가 그 안에서 일렁였다. 그는 그것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잎 속에는 바다가 있었다. 끝이 없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위를 떠도는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있었다. 엘라의 웃음, 나에라의 노래, 루디안의 말,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까지. 그 모든 것이 물결처럼 부서지고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순간, 바람이 속삭였다.
— “이제 감정은 바다가 되었어요.”
엘라의 목소리였다.
“선생님, 무슨 뜻이에요?”
— “별의 기억이 한계를 넘었어요. 이제 모든 감정이 모여 하나의 흐름이 되었죠. 그것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위험해요. 감정의 바다는 방향을 잃으면 스스로 도시를 삼켜버릴 수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 “흐름을 가두지 마세요. 대신, 그 속으로 들어가세요.”그날 밤, 로안은 결심했다. 그는 빛나무의 중심으로 향했다. 루디안이 그를 붙잡았다.
“로안, 네가 하려는 게 뭔지 알아. 하지만 그건 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감정이 흐르지 않으면, 결국 리안테르는 또다시 침묵하게 될 거예요. 그건 우리가 지켜온 모든 걸 부정하는 일이에요.”
루디안은 한참 침묵하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럼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올게요. 감정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는 한.”그는 나무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뿌리 아래에는 거대한 빛의 구체가 있었다. 그것은 고요했지만, 그 안에서 무수한 목소리가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
“잊지 마.”
“미안해.”
“살고 싶어.”
그건 도시의 사람들의 감정이었다. 하나의 바다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로안은 두려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따뜻했다. 그는 손을 빛 구체 위에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순간, 그는 거대한 파도 속으로 떨어졌다. 현실의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감정의 흐름만이 들렸다. 눈앞에는 수천 개의 기억들이 흩어져 있었다. 웃음, 분노, 고통, 행복. 모든 감정이 하나로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 속에서 걸었다. 발밑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물결이 반응했다.
“이게… 감정의 바다…”멀리서 엘라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하얀 옷을 입고, 바다 위를 걷고 있었다.
“당신은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이건 꿈인가요?”
“아니요, 기억이에요. 당신이 느껴온 모든 감정이 여기에 모였어요. 그리고 이제, 당신은 그것의 일부가 되려 하고 있죠.”
“하지만 감정이 이렇게 거대하면… 인간은 감당할 수 없어요.”
“맞아요. 하지만 인간은 감당하지 못하면서도, 여전히 감정을 선택해요. 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뜻이죠.”엘라는 손을 들어 바다 위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빛으로 된 길이 생겨나 있었다. “저길 따라가세요. 그 끝에 리안테르의 심장이 있어요. 그 심장이 멈추면, 도시의 감정 순환도 함께 멈춰요.”
로안은 깊은 숨을 내쉬고 길을 걸었다. 발밑의 물결이 그를 인도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그를 감쌌다.
— “용서해.”
— “고마워.”
— “두렵지만 괜찮아.”
그 모든 감정이 그를 하나의 빛으로 감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바다의 중심에 도착했다. 거기엔 거대한 구형의 심장이 있었다. 그것은 리안테르 전체의 감정을 품고 있었고, 그 맥박이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그는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괜찮아. 멈추지 마.”
심장은 떨렸지만, 여전히 약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럼… 내 감정을 나눌게.” 그리고 자신의 기억을 열었다. 엘라와 처음 만난 날, 나에라의 웃음, 루디안의 조언, 그리고 언덕 위의 별빛. 그 모든 기억이 빛이 되어 심장 속으로 흘러들어갔다.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리안테르의 하늘이 번쩍이며 밝아졌다. 하늘의 별들이 동시에 반응했고, 도시 전역의 창문마다 빛의 파동이 퍼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가슴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렸고, 누군가는 미소 지었다. 감정의 바다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파괴가 아니라 생명이었다.
로안의 몸은 점점 빛 속으로 스며들었다. 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은 이제 감정의 파동이 되었어요. 리안테르는 당신을 기억할 거예요.”
그는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선생님, 제 이야기를 기억해 주세요.”
— “물론이죠. 당신의 감정은 이제 이 도시의 물결이 되었어요.”그날 새벽, 리안테르의 하늘에서 빛의 비가 내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감정의 바다’의 눈물이라 불렀다. 그리고 빛의 언덕 위에는 여전히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는 로안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 “감정은 멈추지 않는다. 바다처럼 흘러, 언젠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날 이후, 리안테르의 아이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감정의 바다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야.”도시는 다시 노래하기 시작했다.
빛은 하늘로, 감정은 물결로, 기억은 노래로 변해 흘렀다.
그리고 그 노래의 끝에는 언제나 같은 문장이 남았다.“감정은 곧 생명이다. 그것이 멈추는 날, 별도 함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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