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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28부 : 시간이 멈춘 거리빛의 언덕에서 2025. 10. 28. 12:22반응형
리안테르의 아침은 언제나 빛으로 시작했지만, 그날의 빛은 이상했다. 햇살은 여전히 부드럽게 도시를 감싸고 있었으나, 그 빛 속에는 움직임이 없었다. 나무의 잎사귀가 흔들리지 않았고, 시장의 깃발이 바람에 펄럭이지도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눈을 뜬 채, 미소를 머금은 채, 숨을 쉬지 않았다. 시간 자체가 고요하게 정지해 있었다.
무음의 아이는 언덕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별빛이 담겨 있었지만, 그 별빛은 잔잔한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그는 도시로 걸어 내려가며 조용히 사람들 곁을 지나쳤다. 아이들은 웃는 표정 그대로 멈춰 있었고, 장인들은 도자기를 굳히던 손짓 그대로 굳어 있었다. 바람마저 사라진 이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조각상처럼 완벽하게 고요했다.그때, 감정의 나무에서 한 줄기 빛이 내려왔다. 그 빛은 길게 이어져 아이의 발밑으로 흘렀고, 그 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 “이건 감정의 정지 상태야.”
“로안 선생님… 이건 왜 일어난 거예요?”
— “감정이 너무 오래 흐르면, 결국 순환을 멈추게 돼요. 리안테르는 감정을 공유하면서 완벽한 균형에 도달했지. 하지만 균형이 완벽해지는 순간, 생명은 움직이지 않게 돼요.”
“감정이 완벽하면… 살아 있지 않은 건가요?”
— “그래요. 감정은 살아 있으려면 불안정해야 해요. 흔들리고, 부딪히고, 다시 깨어나야 하죠. 지금의 리안테르는 완전함 속에서 죽어가고 있어요.”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 “균열을 만들어야 해요. 완벽함을 깨뜨리지 않으면, 이 도시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해요.”
“하지만 균열은 아픔을 가져올 거예요.”
— “맞아요. 그러나 아픔이 없으면 감정은 흐르지 않아요.”아이의 손끝에서 미세한 빛이 피어났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향해 빛을 던졌다. 빛은 대기 중으로 흩어지며 공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파문이 번졌다. 멈춰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동시에 흔들렸고, 공기가 떨렸다.
“움직여라…”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시 느껴라.”그러자 도시의 건물들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돌바닥이 미세하게 갈라지고, 유리창이 울렸다. 그리고 드디어, 한 여인이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두 손을 얼굴로 가져가며 속삭였다.
“나… 울고 있나요?”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그것이 신호였다. 그녀의 울음이 바람을 불러왔고, 바람이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순간, 멈춰 있던 세상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도시의 종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예전보다 낮았다. 느리고, 묵직하고, 어딘가 슬펐다. 사람들은 다시 숨을 쉬었지만, 모두가 무언가를 잃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감정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그 감정은 단순히 기쁨이나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깨어남의 고통’이었다.
루디안의 제자였던 노년의 학자 ‘타렌’이 광장으로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의 파동을 측정하며 말했다.
“이건 새로운 감정의 단계야.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불안정한 감정의 핵.”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아이를 바라봤다.
“이건 네가 만든 일이냐?”
무음의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완벽함을 부수지 않으면 아무도 다시 느낄 수 없었어요.”
“넌 고통을 선택했구나.”
“고통은 생명의 언어예요.”그 대답에 타렌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너는 이제 로안의 마지막 후계자구나.”
그날 밤, 리안테르의 하늘은 수천 갈래의 색으로 물들었다.
별들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흔들렸고, 하늘의 편지들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엔 완벽한 문장이 아니었다. 단어들이 끊어지고, 불완전하게 이어져 있었다.
— “사…랑…했…”
— “…괜…찮아…”
— “돌…아…”
그 불완전한 문장들이 하늘을 뒤덮자, 도시의 사람들은 눈을 감았다.
그들은 이해했다.
감정이란, 완성되지 않기에 아름다운 것임을.무음의 아이는 언덕 위에서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감정의 나무는 부서진 가지 사이로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그 새싹은 이전의 빛과 달리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그는 손끝으로 그 빛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이건 불안정한 별이야. 하지만 살아 있어.”그 순간, 바람이 불며 하늘을 흔들었다.
도시의 불빛이 함께 흔들리고, 사람들의 마음이 그 떨림에 반응했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는 이유도 모른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그리고 그 모든 소리가 하나의 거대한 진동으로 합쳐졌다.
그건 다시 한 번, 리안테르의 심장이 뛰는 소리였다.그날 이후 사람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완벽함이 멈추면 생명도 멈춘다.
하지만 불완전함이 시작되면, 세계는 다시 노래한다.”리안테르의 하늘 아래,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감정은 이제 균형을 잃은 채 살아 있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생명의 형태였다.“감정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늘 다시 태어나며, 다시 흔들린다.”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