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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빛의 언덕에서》 제10부 : 숨은 노래
    빛의 언덕에서 2025. 10. 9.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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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안테르의 공기는 유리처럼 투명했다. 깨질 듯이 맑았지만, 그 안에 스며든 미세한 진동은 분명히 살아 있었다. 그것은 아무도 내지 않는 소리, 들리지 않는 멜로디였다. 사람들은 그걸 ‘오류’라고 불렀지만, 엘라 미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그날 아침, 도시 전역에서 감정감지기가 동시에 불안정한 파동을 보냈다. 검열국은 원인을 찾지 못했다. 누군가가 네트워크에 ‘노이즈’를 심은 것이다. 그건 전파가 아니라, 주파수에 녹아든 기억이었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온 멜로디의 잔향, 레오의 마지막 신호였다. 엘라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암호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암호의 마지막 조각을 해독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수첩이 있었다. 표지는 닳아 있었고, 안쪽에는 숫자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숫자들은 음악의 박자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위치 좌표였다. 빛의 언덕 아래, 리안테르의 가장 깊은 곳. 그곳이 신호의 근원지였다. 레오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이었다.

    밤이 되자, 엘라는 교육관의 불을 끄고 조용히 나섰다. 골목마다 감시 드론이 날아다녔지만, 그녀는 이제 두려워하지 않았다. 몸에 흐르는 공기조차 살아 있는 듯 느껴졌다. 그녀는 하르브가 남긴 메모리칩을 목걸이처럼 걸고, 도시의 하수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는 물 대신 회색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오래된 송신기들이 부서진 상태로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깊은 벽면에,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빛의 언덕’의 상징이었다.

    엘라는 벽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희미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오르골의 선율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르게 들렸다. 그 안에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 어른들의 숨소리, 누군가의 기도, 그리고 레오의 마지막 말. “이 노래를 숨기세요. 누가 들어도 모르게. 당신이 들을 수 있다면, 당신이 이어야 합니다.”

    엘라는 손끝으로 벽을 따라가며 음악의 흐름을 쫓았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오래된 통신기 한 대가 숨겨져 있었다. 먼지와 녹이 뒤섞여 있었지만, 여전히 작동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조심스레 스위치를 눌렀다. 화면에 글자가 하나씩 떠올랐다. “REO ALARIS : SIGNAL ACTIVE.”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레오…?” 화면에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엘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닙니다. 내 감정입니다. 내가 살아 있지 않더라도, 감정은 남아 있을 거예요. 당신이 이걸 듣고 있다면, 세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그 순간, 머리 위에서 굉음이 울렸다. 검열국의 추적 신호가 그녀를 찾아내고 있었다. 루디안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퍼졌다. “엘라 미렌, 당신은 감정 전파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저항하지 마세요.”

    엘라는 통신기의 주파수를 다시 조정했다. 화면이 깜박이며 음악의 일부가 증폭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멜로디가 아니라, 감정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이 주위의 전파망을 뒤흔들었다. 루디안의 드론이 일시적으로 정지했다. 그는 금속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당신은 감정에 중독됐어요.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파멸입니다.” 엘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은 감정을 잃은 채 살아남았죠. 그게 구원입니까?”

    그녀는 통신기 옆의 레버를 당겼다. 순간, 천장의 조명들이 동시에 꺼졌다. 오직 음악만이 어둠을 채웠다. 그리고 그 음악 속에서 루디안의 손이 멈췄다.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났다. 기억이었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그에게 불러준 자장가. “루디안…” 엘라가 속삭였다. “당신도 들리죠?”

    루디안은 총을 떨어뜨렸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혀 울렸다. 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건… 불가능해… 감정은 제거됐어…” 엘라는 고개를 저었다. “감정은 제거할 수 없어요. 단지 숨어 있을 뿐이에요. 바로 지금처럼.”

    그 순간, 통신기의 화면이 밝게 빛났다. “신호 전송 중…” 음악이 도시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거리의 감정감지기가 동시에 폭발하듯 울렸다. 그러나 그것은 경보가 아니라, 해방의 소리였다. 사람들은 귀를 막지 않았다. 그들은 고개를 들고 들었다. 그 소리는 따뜻했고, 부드러웠으며, 인간의 온기를 닮아 있었다.

    엘라는 숨을 고르며 루디안을 바라봤다. “이건 레오의 노래예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의 노래죠.” 루디안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손끝으로 귀를 막았다. 그러나 그 음악은 그의 안에서도 울리고 있었다.

    지하 벽면이 진동했다. 시스템은 신호의 출처를 차단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리안테르 전역의 확성기에서 같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병원, 공장, 학교, 광장, 감정검열국 본부마저 그 음악을 내보냈다.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노래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누군가는 울었고, 누군가는 웃었다. 그건 감정의 귀환이었다.

    엘라는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레오, 당신이 지켜낸 노래가 이제 세상을 깨우고 있어요.” 그녀의 눈가에 빛이 번졌다. 음악이 점점 멀어지더니, 하늘 위로 솟구쳤다.

    리안테르의 하늘은 처음으로 푸르게 빛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깨달았다. 감정이란 금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돌아오는 것이란 걸.

    그날 사람들은 그 노래를 ‘숨은 노래’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은 늘 그들의 안에 있었으니까. 숨겨져 있었을 뿐, 결코 사라진 적이 없었던, 인간의 첫 번째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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