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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9부 : 시간의 저편에서 온 편지빛의 언덕에서 2025. 10. 18. 12:51
리안테르의 하늘은 여느 때보다 투명했다. 감정어 복원소가 세워진 이후, 사람들은 다시 ‘말’을 믿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손글씨로 쓴 문장들이 붙었고, 아이들은 벽에 시를 적었다. 누군가는 “그리워요”라 적었고, 누군가는 “오늘은 웃었어요”라 남겼다. 그렇게 도시에는 매일 수천 개의 작은 감정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평화의 가운데, 이상한 현상이 하나 보고되기 시작했다.어느 날, 복원소의 어린 제자 하나가 로안에게 달려왔다.“선생님! 누가 편지를 보냈어요!”“누가?”“근데… 이상해요. 발신인이 ‘미래의 리안테르 시민’이래요.”편지는 낡은 종이에 쓰여 있었지만, 날짜는 아직 오지 않은 연도였다. 230년 뒤의 날자였다. 로안은 처음엔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봉인을 뜯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잉크는 마르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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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8부 : 잃어버린 언어의 계절빛의 언덕에서 2025. 10. 17. 12:50
리안테르의 하늘은 유난히 고요했다. 그림자의 노래가 울린 지 반년이 흘렀고, 도시는 새로운 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화 속엔 묘한 공허가 있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큰 소리로 웃지 않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적당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감정의 폭풍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조율된 세계. 그러나 로안은 그 고요함이 불길했다.그는 강의실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규칙적으로 웃었고, 정해진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음이 틀리지 않았지만, 그 노래에는 온기가 없었다. 로안은 속삭였다. “이건 조율이 아니라, 침묵의 모양이야.”최근 들어 도시 전역에서는 ‘감정의 단어’가 점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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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7부 : 그림자의 노래빛의 언덕에서 2025. 10. 16. 12:49
리안테르의 하늘은 다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의 색이 아니라, 석양의 빛이었다. 도시가 감정으로 깨어난 지 수년이 흘렀다. 바람의 심장이 여전히 박동하고, 빛의 언덕은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 언덕 아래서 태어나고, 어른들은 그곳에서 감정을 되새겼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균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균형은 한순간의 진동에도 흔들릴 수 있었다.로안은 감정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 ‘조율’의 예술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끝없는 회색 도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모두 사라진 곳. 그 속에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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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6부 : 바람의 심장빛의 언덕에서 2025. 10. 15. 12:49
리안테르의 새벽은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언덕 위의 나무가 잎을 흔들며 낮은 음으로 노래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바람 속에는 사람들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웃음의 떨림, 슬픔의 한숨, 사랑의 온기와 두려움의 떨림. 모두가 하나의 맥박처럼 얽혀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의 심장’이라 불렀다.그 바람이 처음 느껴진 날, 로안은 빛의 언덕 아래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 심은 작은 묘목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기억을 품어요.” 아이들이 물었다. “기억이 뭐예요?” 로안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이 흘러간 자리.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 안에 남아요. 우리가 이렇게 돌보는 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그때, 하늘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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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5부 : 기억의 빛줄기빛의 언덕에서 2025. 10. 14. 12:39
리안테르의 새벽은 오랜만에 고요했다. 감정의 부활절이 끝난 다음 날, 도시 전체가 마치 긴 숨을 고르는 듯했다. 거리는 정돈되지 않았지만 평화로웠고, 전광판에는 더 이상 경고 문구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배우고 있었다. 웃음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슬픔을 견디는 법을 배우며,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익혀 나가고 있었다.그러나 도시의 한편, 잿빛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날 밤 나에라의 신호 이후, 그곳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고라 불렀고, 누군가는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부서진 코어 파편들이 서로 끌어당기며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금속이 아니라, 감정의 잔류 신호였다.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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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4부 : 잿빛 도서관의 아이들빛의 언덕에서 2025. 10. 13. 12:38
별이 내린 밤 이후, 리안테르는 겉보기엔 평화로웠다. 거리마다 음악이 흘렀고, 광장에는 웃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의 아래에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균열이 있었다. 감정이 돌아온 도시는 이전과 달리 불완전했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었고, 사랑과 증오가 얽혀 있었다. 감정이 인간을 살게 했지만, 동시에 인간을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루디안이 남긴 빛의 신호가 하늘을 갈랐던 그날 이후, 검열국의 잔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부 과거의 시스템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유령망’이라 불렀다. 끊어진 감정억제 서버의 일부가 스스로를 복구해, 특정 구역의 정보를 다시 수집하고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데이터 복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것은 감정을 기록하고 있었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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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3부 : 별이 내린 날의 약속빛의 언덕에서 2025. 10. 12. 12:38
리안테르의 하늘에 다시 별이 떠오른 것은, 정확히 ‘노래의 귀환’이라 불린 날로부터 100일째 되는 밤이었다. 그전까지 별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억제망이 작동하던 시절, 인공 대기층이 빛의 굴절을 차단했고, 사람들은 수십 년 동안 진짜 밤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거리로 나와 하늘을 바라봤고, 아이들은 그걸 처음 본 것처럼 손가락으로 셌다. “하나, 둘, 셋…”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잊었던 감정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그날 밤, 루디안은 도시의 가장 높은 탑 위에 있었다. 바람은 차가웠고, 탑 아래의 리안테르는 여전히 불완전했다. 감정이 돌아왔지만, 그것은 동시에 혼란도 불러왔다. 누군가는 사랑을 이유로 싸웠고, 누군가는 슬픔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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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언덕에서》 제12부 : 잃어버린 목소리들의 행진빛의 언덕에서 2025. 10. 11. 12:37
리안테르의 새벽은 이제 더 이상 무채색이 아니었다. 며칠째 계속된 혼란 속에서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회색과 푸름이 섞인 미묘한 빛이 도시 위를 덮고 있었고, 그것은 마치 “인간이 다시 살아 있다”는 징표처럼 느껴졌다. 감정억제망이 해제된 이후, 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리듬을 갖기 시작했다. 감정감지기의 불빛은 모두 꺼졌고, 방송국에서는 더 이상 “질서 유지 지침”을 송출하지 않았다. 대신 곳곳에서 자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음악과 웃음소리가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시작은 언제나 불안의 그림자를 동반했다.감정검열국은 해체되지 않았다. 혼란 속에서도 남은 고위 인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감정 복귀 사태”를 ‘정신적 바이러스’로 규정했다. 도시 곳곳에는 새로운 구호문이 붙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