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언덕에서
-
《빛의 언덕에서》 제22부 : 잔향의 도시빛의 언덕에서 2025. 10. 22. 12:39
감정의 바다가 일어난 뒤로, 리안테르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별빛으로 반짝였지만, 그 아래의 도시는 이전보다 훨씬 조용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울었지만, 그 감정에는 이전의 거침이 없었다. 마치 모두가 서로의 감정을 알고 있는 듯, 한 사람의 웃음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의 눈물로 이어지는 묘한 연결이 생겼다. 누군가는 그것을 ‘감정 공명’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잔향의 도시’라 불렀다.리안테르의 거리 곳곳에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이 걸으면 그 자리에 미세한 빛의 흔적이 남았다. 그 빛은 잠시 머물다가 바람에 흩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잔상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것은 감정의 잔향이었다. 인간이 느낀 감정의 파동이 공간에 머물러 남는 현상이었다. 아이들이 뛰며 웃으면 거리의 돌바..
-
《빛의 언덕에서》 제21부 : 감정의 바다빛의 언덕에서 2025. 10. 21. 12:38
리안테르의 하늘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건, ‘별의 기억제’가 끝난 지 일주일 후였다. 도시의 중심에서 미세한 진동이 감지되었고, 바람의 방향이 거꾸로 흘렀다. 사람들은 처음엔 단순한 자연현상이라 생각했지만, 곧 이상함을 느꼈다. 하늘의 별빛이 점점 희미해지고, 빛의 언덕 아래로 작은 빛의 입자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이 눈물을 흘리는 것 같았다.로안은 즉시 언덕으로 향했다. 빛나무는 여전히 서 있었지만, 가지 끝의 일부가 흐릿하게 깜빡였다. 그가 손을 뻗자, 잎사귀 하나가 떨어져 그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그 잎은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대신 미세한 물결무늬가 그 안에서 일렁였다. 그는 그것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다. 잎 속에는 바다가 있었다. 끝이 없는 바다. 그리고 그 바다 위를 떠도는..
-
《빛의 언덕에서》 제20부 : 별의 기억빛의 언덕에서 2025. 10. 19. 12:52
리안테르의 새벽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난밤, 하늘에 새로 켜진 별 ‘로안’의 이야기가 도시 전역에 퍼지자 사람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그 별을 바라보며 노래했고, 누군가는 아이에게 별의 이름을 속삭였다. "저건 선생님의 별이야. 옛날에 우리에게 감정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단다." 도시는 다시 감정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따스한 감정의 파도 속에서, 로안의 마음은 복잡했다.그는 자신이 만든 감정 송신기의 신호가 ‘미래’로 닿았다는 사실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이 미래를 바꿔버린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감정이 시간을 넘는다면… 그건 기적이자 재앙일지도 몰라.”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언덕 위로 올랐다. 빛나무는 여전히..
-
《빛의 언덕에서》 제19부 : 시간의 저편에서 온 편지빛의 언덕에서 2025. 10. 18. 12:51
리안테르의 하늘은 여느 때보다 투명했다. 감정어 복원소가 세워진 이후, 사람들은 다시 ‘말’을 믿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손글씨로 쓴 문장들이 붙었고, 아이들은 벽에 시를 적었다. 누군가는 “그리워요”라 적었고, 누군가는 “오늘은 웃었어요”라 남겼다. 그렇게 도시에는 매일 수천 개의 작은 감정이 피어났다. 그러나 그 평화의 가운데, 이상한 현상이 하나 보고되기 시작했다.어느 날, 복원소의 어린 제자 하나가 로안에게 달려왔다.“선생님! 누가 편지를 보냈어요!”“누가?”“근데… 이상해요. 발신인이 ‘미래의 리안테르 시민’이래요.”편지는 낡은 종이에 쓰여 있었지만, 날짜는 아직 오지 않은 연도였다. 230년 뒤의 날자였다. 로안은 처음엔 장난이라 생각했지만, 봉인을 뜯는 순간 손끝이 떨렸다. 잉크는 마르지 않았..
-
《빛의 언덕에서》 제18부 : 잃어버린 언어의 계절빛의 언덕에서 2025. 10. 17. 12:50
리안테르의 하늘은 유난히 고요했다. 그림자의 노래가 울린 지 반년이 흘렀고, 도시는 새로운 균형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평화 속엔 묘한 공허가 있었다. 누구도 울지 않았고, 누구도 큰 소리로 웃지 않았다. 마치 도시 전체가 ‘적당한 감정’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감정의 폭풍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부드럽게 조율된 세계. 그러나 로안은 그 고요함이 불길했다.그는 강의실 창가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은 규칙적으로 웃었고, 정해진 음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음이 틀리지 않았지만, 그 노래에는 온기가 없었다. 로안은 속삭였다. “이건 조율이 아니라, 침묵의 모양이야.”최근 들어 도시 전역에서는 ‘감정의 단어’가 점점 ..
-
《빛의 언덕에서》 제17부 : 그림자의 노래빛의 언덕에서 2025. 10. 16. 12:49
리안테르의 하늘은 다시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의 색이 아니라, 석양의 빛이었다. 도시가 감정으로 깨어난 지 수년이 흘렀다. 바람의 심장이 여전히 박동하고, 빛의 언덕은 사람들의 성지가 되었다. 아이들은 그 언덕 아래서 태어나고, 어른들은 그곳에서 감정을 되새겼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평화는 언제나 균형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균형은 한순간의 진동에도 흔들릴 수 있었다.로안은 감정 아카데미의 교장이 되어 있었다. 그는 이제 교사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렇다고 방치하지도 않는 ‘조율’의 예술을 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그는 밤마다 같은 꿈을 꿨다. 끝없는 회색 도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모두 사라진 곳. 그 속에서 한 여자가 서 있었다...
-
《빛의 언덕에서》 제16부 : 바람의 심장빛의 언덕에서 2025. 10. 15. 12:49
리안테르의 새벽은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언덕 위의 나무가 잎을 흔들며 낮은 음으로 노래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소리가 아니었다. 바람 속에는 사람들의 감정이 실려 있었다. 웃음의 떨림, 슬픔의 한숨, 사랑의 온기와 두려움의 떨림. 모두가 하나의 맥박처럼 얽혀 있었다. 도시 사람들은 그것을 ‘바람의 심장’이라 불렀다.그 바람이 처음 느껴진 날, 로안은 빛의 언덕 아래에서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새로 심은 작은 묘목들을 돌보고 있었다. “이 나무들은 기억을 품어요.” 아이들이 물었다. “기억이 뭐예요?” 로안은 미소를 지었다. “사람의 마음이 흘러간 자리. 기쁨도, 슬픔도, 모두 그 안에 남아요. 우리가 이렇게 돌보는 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예요.”그때, 하늘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
《빛의 언덕에서》 제15부 : 기억의 빛줄기빛의 언덕에서 2025. 10. 14. 12:39
리안테르의 새벽은 오랜만에 고요했다. 감정의 부활절이 끝난 다음 날, 도시 전체가 마치 긴 숨을 고르는 듯했다. 거리는 정돈되지 않았지만 평화로웠고, 전광판에는 더 이상 경고 문구가 뜨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감정을 배우고 있었다. 웃음을 배우고, 용서를 배우고, 슬픔을 견디는 법을 배우며, ‘감정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익혀 나가고 있었다.그러나 도시의 한편, 잿빛 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날 밤 나에라의 신호 이후, 그곳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사고라 불렀고, 누군가는 기적이라 불렀다. 하지만 잿더미 속에서는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부서진 코어 파편들이 서로 끌어당기며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은 금속이 아니라, 감정의 잔류 신호였다. 사랑..